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8일] <1504> 도망노예송환법


'노예탈출 협력자 엄벌. 도망 노예의 법정 진술권 박탈, 배심원 평결적용 대상 제외. 법 집행 거부 또는 노예를 놓친 연방보안관 처벌.' 1850년 9월18일,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도망노예송환법(FSAㆍFugitive Slave Act)'의 골자다. 반(反)인권적이고 반문명적 독소 조항을 대거 담았던 이 법이 통과된 것은 연방의 분열을 막을 '1850년 대타협(Compromise of 1850)'의 핵심 사안이었기 때문. 1848년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서부 영토에서의 노예제도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의 분열이 극한양상으로 치닫자 나온 절충안이었다. 법이 발표되자 남부는 환호성을 질렀다. 대농장주들의 힘을 의식한 언론은 침묵하고 목사들은 하늘에 영광을 돌렸다. 몇몇 북부 자유주에서 이 법을 무효화하는 주 법률을 제정하며 저항했으나 남부 출신이 많은 연방대법원에 막혔다. 얼마나 많은 노예가 이 법에 따라 남부로 되돌아갔을까. 300여명에서 수천명까지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분명한 점은 역효과를 낳았다는 점. 북부를 각성시켜 탈출노예지원단체가 늘어나고 노예 문제로 내분을 겪던 휘그당은 공화당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스토 부인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이 법에 대한 반감에서 태어났다. 대의명분에서 밀린 남부의 선택은 전쟁. 노예송환법의 효과를 얻지 못한 채 북부의 반감만 증폭시킨 결과는 남북전쟁이었다. 결국 이 법은 북군의 승리가 확실해진 1864년 폐지됐다. 만약 미국인들이 보수종교와 3류 신문들의 권고대로 노예의 인권과 자유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오늘날 미국이 성될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법 마련 이후 노예들은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으나 머지 않아 자유의 발판을 얻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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