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글로벌 포커스] 곳간 빈 선진국들 "내 코가 석자"… 해외 원조 '뒤꽁무니'

재정위기에 "가용 자금 없다" 美 해외지원 자금 대폭 줄여 EU도 최소 예산만 책정<br>"수단등 심각한 유동성 부족 극단주의 다시 발호 가능성 국제 평화·안정에 악재"


"그 동안 진행해왔던 해외 원조를 재검토할 때가 왔다." 지난달 중순 미국 워싱턴의 세계은행ㆍ국제통화기금(IMF) 연례총회.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이날 "세계은행이 가난한 나라를 돕는 지원기구 역할까지 맡기는 힘들어졌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졸릭 총재의 발언은 "세계 경제가 이미 위험 상황에 진입했다"는 경고와 맞물려 큰 파장을 낳았다. 재정위기에 신음하는 선진국의 곳간이 텅텅 비어 더 이상 돈을 풀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고백한 셈이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의 재정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신용 경색으로 이어지며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주요 선진국이 해외 원조예산을 잇달아 삭감하고 나섰다.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긴축 정책을 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 밖 사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했던 미국부터 당장 허리띠를 졸라 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지난해 395억4,000만달러에 달했던 미국의 해외 원조 예산은 올해 347억2,000만달러로 50억달러 가까이 삭감됐으며 2012년에는 323억6,000만달러(하원 예산안 기준)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원조예산 삭감은 당장 한푼이 아쉬운 지구촌 곳곳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식량ㆍ의료 원조는 물론이거니와 올해 대규모 재해를 입은 파키스탄에 대한 구호자금이나 민주화의 새싹이 움트고 있는 중동에 대한 지원도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됐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 민주주의를 꿈도 꾸기 어려웠던 곳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다"면서도 "불행히도 미 정부는 심각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어 이들 지역에 마셜플랜을 시행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마셜플랜은 2차세계대전 직후 미 정부가 서유럽 지역에 자금을 투입해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왔던 원조계획을 의미한다. 공공교육에서 군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전 분야에서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 더 이상은 가용 자금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미 국무부는 해외원조자금을 포함한 국무부 예산을 80억달러나 줄일 계획인데 이는 단일 부서에 대한 최대 규모의 예산 삭감이다. 미 하원의 케이 그레인저 세출 분과위원회 의장은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우선 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며 "파키스탄 홍수에 2억5,000만달러를 지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국민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미 하원은 이밖에도 유엔과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대한 지원도 축소할 계획이다. 유럽도 해외 원조자금 삭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재정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제하기 위해 4,400억유로 규모로 증액하기로 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에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야 하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들은 더 이상 해외 원조에 쏟아 부을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이른바 '재스민 혁명'에 성공한 튀니지에 경제 부흥을 위해 1억5,700만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지난달 29일 발표했다. EU에 가입한 나라가 27개국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의 예산을 책정했다는 게 외신들의 지적이다.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아 그나마 사정이 나은 유럽국가들도 해외 원조에 인색하기는 마찬가지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재무장관은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경우 해외 지원 예산을 줄이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했으며 노르웨이는 5,520만달러의 아프가니스탄 원조 자금을 동결할 예정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중앙은행인 카불은행이 9억2,600만달러의 대출을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지속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영국 보수당의 한 관계자는 "지나치게 많은 돈이 EU와 외국을 위해 쓰이고 있다"며 "이 돈을 국민을 보호하는데 써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데이비드 캐머론 현 국무총리가 취임한 지난해 5월 이후 해외 원조에 800억파운드를 쏟아 부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연간 국방예산인 350억파운드를 상회하는 수치라고 FT는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해외 원조가 절실한 가난한 국가들은 심각한 유동성 부족에 직면했다. 세계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올해 외부 지원자금으로 9억6,700만달러를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10월 현재 2억9,300만달러를 지원받는데 그쳤다. 보고서는 PA가 은행 대출로 예산을 마련하고 있어 UN 정회원국 가입이 승인되더라도 이후 예산 불균형에 고통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수단 역시 경제 재건을 위해 해외 원조를 기다리는 국가 중 한 곳이다. 알리 마흐무드 수단 재무장관은 "앞으로 1년 간 15억달러를 지원 받아야 한다"며 "IMF 등의 원조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난달 밝혔다. 하지만 유럽에 발목이 잡힌 IMF도 수단을 보살필 여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해외 원조 축소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악재가 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NYT는 "빈국에서 극단주의가 다시 발호할 가능성도 있다"며 "원조 예산 절감이 국내 경기 부양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하지만 세계적인 부작용은 이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가 끊기면 결국 글로벌 소비가 위축돼 세계경제 전반에 나쁜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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