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석유산업의 역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초기 출범한 대한석유공사, 즉 현재의 SK㈜에서 시작된다.그리고 지난 40여년동안 석유업계는 새로운 사업자가 등장할 때마다 한정된 파이를 쪼개가지는 형식으로 성장해왔다. 처음 대한석유공사 독점에서 호남정유와의 양사체제로, 다시 3사·4사·5사 체제로 점차 복잡해지면서 점유율도 변했다. 그리고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국내 정유업계는 다시 4사 체제를 굳혀가고있다.
62년 당시 정부는 석유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없이는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가경제의 기간산업으로서 석유산업의 위상을 일찌감치 인정했던 것이다.
유공은 64년 4월1일 하루 원유정제능력 3만5,000배럴규모의 제1 상압증류시설을 가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유생산에 나섰다. 이후 시설확장과 석유화학산업 진출을 위해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걸프의 지분이 급격히 불어났고 지분이 50%로 늘어난 70년8월부터 10년간은 걸프가 아예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걸프는 두차례 석유위기로 국내 석유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자체의 원유공급능력도 떨어지자 80년8월 보유주식을 모두 우리 정부에 넘기고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유공 민영화가 추진된 계기였다. 결국 80년12월 유공주식 50%와 경영권이 선경(현 SK그룹)으로 넘어갔다. SK㈜는 현재 SK그룹의 주력회사로 성장했다.
유공 설립이후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짜면서 제2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했고 결국 67년 럭키가 미국 칼텍스석유와 합작으로 호남정유, 즉 현재의 LG칼텍스정유를 출범시켰다.
당시 제2 정유공장 선정에 참여했다가 탈락한 한국화약(현 한화그룹)은 발전사업을 거쳐 70년 제3 정유업체로 선정돼 숙원을 풀었다. 당시 회사명은 경인에너지. 올해 현대정유로 인수된 비운의 한화에너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현대정유의 전신인 극동정유는 64년 설립됐지만 본격적인 정유회사 변신은 69년 세계적인 석유메이저인 로얄더치셸과 합작으로 극동셸석유부터다. 77년 이 회사의 지분 50%를 갖고있던 셸이 철수하면서 극동석유로 이름을 바꾸었고 동시에 셸이 팔아버린 지분은 현대가 인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93년 경영권이 현대로 넘어오면서 다시 현대정유로 변신했다.
74년 석유위기이후 원유의 안정적 공급이 지상과제로 떠오를 때 등장한 회사가 한·이석유주식회사다. 쌍용그룹이 이란의 국영석유공사와 50대 50합작으로 설립한 이 정유사는 80년 이란국영석유공사의 철수이후 쌍용정유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최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사가 쌍용정유에 뛰어든 것은 91년8월에 들어서였다.
석유산업은 자유화와 개방화를 골자로 한 석유사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95년12월 중대 기로에 섰다. 또 98년10월엔 다시 석유사업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외개방이 완전히 마무리됐다.
현실적으로 석유산업은 차별화가 어려운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원유를 투입해 여러 제품을 차례로 만들어내는 산업인만큼 증산이나 감산이 어렵고 수급조절도 쉽지않다. 회사별로 제품차별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경영합리화도 쉽지않다. 제품단가에서 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분명해 비용을 줄일 구석이 많지않다.
그러나 이렇게 특색없게 보이는 석유산업도 최근 엄청난 변화의 기로에 섰다. 품질경쟁과 가격경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있으며 주유소마다 경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직원들은 손님들이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극진하게 서비스한다. 변화는 이런 곳에서 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