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는 기어이 게이샤에게 어설픈 영어를 강요해야만 했을까. 순도 100% 동양인의 눈을 파랗게 물들여야만 했을까. ‘게이샤의 추억’이 영화화됐다. 수백, 수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게 뉴스는 아니겠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영화화 자체로도 분명 뉴스거리로서의 의미가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 이어 할리우드가 동양 문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본 문화에 헌사하는 애정이기 때문이다. ‘섈 위 댄스’의 리메이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서양에게 가장 친숙한, 그리하여 동양 전통문화의 ‘진수’로 왜곡, 오해하고 있는 일본 문화에 대한 경배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80년대 후반 출간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시카고’의 롭 마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소설은 뉴욕대학 일본사 교수인 아서 골든이 1930~40년대 명성을 날렸던 한 게이샤의 고백을 바탕으로 쓴 실화소설. 절망의 삶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와 함께 기모노와 다도로 상징되는 일본 전통 문화의 진수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2차대전을 전후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소녀 치요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최고의 게이샤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순애보적인 사랑과 버무려 담았다. 전쟁 전, 최고의 게이샤로 우뚝 선 사유리(장쯔이ㆍ치요의 게이샤 이름)는 패망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진 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해 명성과 사랑을 쟁취한다. 소설의 방대한 분량을 앞 뒤 생략한 채, 부분각색으로 다룬 영화의 방점은 게이샤에 대한 서구 남성의 호기심. 도화지 같은 새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화려한 자수 기모노에 감춰진 작은 체구까지. 인간적이지 않기에 게이샤는 그들의 성적 페티쉬이자 환상 그 자체인 존재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변 배경인 화려한 사원과 일본식 정원, 그리고 사유리의 화려한 춤사위는 그 환상을 드러내놓고 장식한다. 게이샤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배는 게이샤의 인간적이고 여자로서의 존재감을 깨끗이 지워낸다. 자신을 예술가로 지칭하는, 그렇기에 게이샤는 몸을 팔지 않는다고 말해놓고선, 사유리의 순결 경매가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이 영화의 모순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대놓고 아름답게만 포장하려 하다 보니 인간에 대한 철학적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게이샤를 향한 어설픈 고민이 없었다면, 호기심어린 존재 그 자체로만 바라보기 편할 뻔 했다. 어차피 서양인의 눈요기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영화. 제목부터 게이샤의 ‘추억’ 아닌가. 자칫 동양 한 구석의 섬나라의 극단적이고 기이한 전통문화가 동양 문화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건 아시아 관객으로서의 기우일까. 기모노를 차려입은 장쯔이에 중국 언론들은 신경질적인 반응까진 보이지만, 어쨌튼 그녀의 기모노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불러 일으킬 만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