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9일] 바이츠만


차임 바이츠만(Chaim Weitzman). 누구보다 정치사ㆍ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준 과학자다. 그가 아니었다면 영국이 1차 대전에서 지고 이스라엘의 국가 탄생이 무산되거나 지연됐을지도 모른다. 출생지는 러시아. 1874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스위스와 독일의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다. 1900년 박사학위를 받고 제네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06년 영국 멘체스터대학으로 옮기며 유대민족주의자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영국은 유대인들을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그만큼은 살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폭약 때문이다. 1차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봉쇄로 화약 원료인 칠레초석 수입이 끊겨 탄약과 폭탄 부족에 직면한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게 바이츠만이다. 녹말에서 아세톤을 뽑아내 고성능 탄약 원료를 생산한 것. 바이츠만의 공로는 1917년 영국의 이스라엘 건국 지원 약속으로 이어졌다. 타협의 설득과 달인이었던 바이츠만은 1919년 아랍의 실권자인 파이잘 왕자와 만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장려한다’는 약속까지 얻어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증한 것도 이때부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언된 지 11분 만에 트루먼 대통령이 중동의 석유이권을 의식한 마셜 국무장관 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인을 발표한 배경에도 바이츠만과의 교분이 깔려 있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바이츠만은 화합에 전력을 기울였다. 좌우정당은 물론 아랍인까지 아우르는 평화정책이 실권을 가진 강경파 벤구리온 총리에게 막히자 사임한 뒤에는 연구소를 설립, 후진을 키웠다. 1952년 11월9일 바이츠만은 76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바이츠만대학과 연구소는 농업과 화학에 관한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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