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이병헌 "할리우드서 10시간씩 기다리다 촬영 못한 날 많아"

[인터뷰] "'지.아이.조' 출연 결정 앞두고 고민에 고민 거듭"


'한류스타' 이병헌이 '할리우드 스타'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와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두 할리우드 작품에 연달아 이름을 올린 그는 '지.아이.조'의 전 세계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몇몇 배우들이 단순 미국 개봉작을 두고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요란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과 달리 할리우드에 진출한 국내 배우 중 최고의 개런티에 인지도 높은 배역을 소화해냈지만 "10억이라는 개런티는 에이전트가 노력했기 때문"이라거나 "할리우드 배우로서 크게 성공하겠다는 목표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세계 관객에게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처음 알리게 됐다는 소회가 있을 뿐"이라는 겸손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다음은 이병헌과 나눈 일문일답.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출연해 개봉을 앞둔 소감은. ▲ 내한 기자회견과 언론시사를 마치고 이제야 한시름 놨다. 기존의 내 연기 패턴과는 전혀 다른 SF 블록버스터를 처음 선보이려니 걱정이 앞섰다. 사실 초반 영화 선택 과정에서 긴 고민이 있었다. 촬영 중에도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뭘 하는 건가 고민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는 함께 출연한 시에나 밀러도 마찬가지더라. 블루 스크린 앞에서 "이 앞으로 차가 지나간다. 폭탄이 터질 거다"라는 말만 듣고 상상하며 연기하려니 얼마나 어려웠겠나. 얼마 전 일본 프로모션에서 시에나 밀러와 만나 "영화를 봤느냐, 정말 놀랍다"며 서로 안심했다. - 캐스팅 당시 심경은. ▲ 처음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게 뭐야"라며 책을 집어 던졌다. 원작 만화인 '지.아이.조'에 대해 전혀 몰랐을 뿐더러 내용이 와 닿지도 않았다. 대사 또한 매우 일차원적이라 "공격하라", "나를 따르라" 등 매우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출연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미이라' 시리즈를 만든 스티븐 소머즈 감독과 명 프로듀서인 로렌조 디 보나벤츄라의 조합이었다. 두 사람은 웬만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간과할 수 없는 조합이다. 이들이 뭉친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자기 나라에서 높은 위상을 가진 동양 배우들도 할리우드만 가면 무술이나 칼로 연기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미국 에이전트가 "네 심정은 충분히 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좋은 기회다. 꼭 한 번만 생각해보라"며 강력히 추천했다. 배우로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할리우드에 가서 나를 알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술에 배부르지는 않겠지만 이번 기회가 좋은 과정이 될 거라는 자기 합리화도 있었다. - 29일 '지.아이.조' 기자회견에서 소머즈 감독과 채닝 테이텀, 시에나 밀러 등 모두 '달콤한 인생'을 보고 감명 깊었다고 했다. 배우 이병헌의 할리우드 인지도가 꽤 높은 것 같다. ▲ 채닝 테이텀은 이번 영화를 찍기 전에 '달콤한 인생'을 이미 봤던 것 같고 시에나는 아마 영화 촬영이 다 끝난 후 DVD를 빌려 본 게 아닐까.(웃음) 미국을 오가며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만나봤더니 '달콤한 인생'을 접한 관계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달콤한 인생'을 찍을 때나 촬영 후에도 그런 예상을 못했는데 나를 세계의 업계 관계자들에게 주목하게 한 작품이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 스톰 쉐도우 역에 대한 호감도는 어느 정도였나. ▲ 칼을 든 무사 역할에 대한 관심은 이전엔 별로 없었다. 그런 역을 선호한다면 벌써 해봤겠지. 하지만 촬영에 임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지.아이.조'가 어떤 존재인지 또한 스톰 쉐도우가 얼마나 인기 있는 캐릭터인지를 깨달았다. 원작의 팬들에게는 마치 스톰 쉐도우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같은 인물과 다름없었다. 장난감 가게에 가면 피규어만 해도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일전에 어느 극장의 작은 관에서 우리 가족끼리 모여 이번 영화를 봤는데 그 때서야 내가 엄청난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이 실감나더라. - 개런티로 10억을 받았다는 것이 화제가 됐는데. ▲ 사실 10억이라는 개런티는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배우들도 톱스타급이 아닌 이상 그 정도의 액수는 받기 힘들다. 그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일본, 중국 배우도 마찬가지다. 개런티 부분에 내가 관여한 것은 없다. 다만 금액을 듣고 내 미국 에이전트의 힘이 세구나라고 느꼈을 뿐이다.(웃음) - 영화의 2, 3편에도 계약이 됐다던데. ▲ 그 부분은 감독이나 제작자도 확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1편이 개봉된 후 예매율과 성공 여부를 살핀 후에야 2부의 제작여부가 결정된다. 8일 이후에 여부가 확정될 것 같다. - 극 중 영어 발음이 매우 자연스럽더라.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 영어를 배운 건 고3때와 재수하면서 영어 학원을 다닌 게 전부다. 다만 운이 좋은 건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드라마 '백야 3.98' 때도 러시아어를 딱 일주일 배웠는데 발음이 좋다고 칭찬 받았다. 영어 연기 때문에 고생한 것은 먼저 촬영한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 때다. 다른 건 몰라도 대사 때문에 NG를 내지는 말자는 생각에 악착같이 대사를 외웠다. 하지만 대사만 외운다고 해결 되는 게 아니다. 말의 뉘앙스와 발음, 장·단음과 목소리 톤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이스 트레이너가 장·단음을 지적해주면 감정 연기고 뭐고 다 까먹는다. 오랜만에 코에 땀이 송송 맺히며 NG를 낸 경험도 있다. '지.아이.조'에서는 개인별로 보이스 트레이너가 붙는다고 듣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여자 트레이너가 딱 한 명 있더라. 그런데 그마저도 주인공들과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내 차례가 안 돌아와 미국 매니저에게 난리를 쳤는데 파라마운트사는 워낙 복잡해서 트레이닝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것만 며칠이다. 결국 촬영 내내 한 시간씩 총 두 번을 지도 받았다. 그런데 그게 대단한 도움이 됐다. - 할리우드 촬영 시스템은 기존 한국 촬영과 차이가 많이 났을 텐데. ▲ 많은 것이 주인공 위주의 시스템이었다. 분장이나 헤어를 관리 받는 차와 사람도 달랐고, 매일 오전 6시에 집합해서 오후 6시까지 촬영하는데 하루 종일 기다렸더니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촬영이 없다고 얘기해주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즐기려 했다. - 촬영이 없는 시간은 어떻게 보냈나. ▲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운동만 했다. 사실 나는 그 곳에서 배우가 아니라 무술인이었다.(웃음) 영화에 등장하는 발차기 액션이나 칼 쓰기 등은 전부 직접 소화했다. 극도로 위험한 신을 제외하고는 대역을 쓰지 않았다. - 채닝 테이텀이나 시에나 밀러와 호흡은. ▲ 두 사람 모두 상상이상으로 소박하고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불평도 잘 안하고 정말 편했다. 그런데 동서양인의 차이가 있는 것이 그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몇 년 만난 사람처럼 친해지는 경향이 있지 않나. 나도 꽤 외향적인 성격인데 트레이닝 받는 몇 달 동안 급격히 친해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쓰는 속어나 말의 뉘앙스를 못 알아 들을수 있으니 나대지 말고 조용히 있자고 생각했는데 스태프 사이에서 "저 동양 배우 건방지고 무게 잡는다"는 소문이 퍼졌다더라. 나중에는 모든 오해를 풀고 친하게 지냈다.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지.아이.조' 최근작 세 작품 모두 악역이다. ▲ 이번 스톰 쉐도우 역은 악역이기도 하지만 미스테리어스한 이중적 느낌이 있는 인물이다. 촬영 중에 그런 내용이 충분히 있었는데 편집에서 단순한 악당으로 변모된 면이 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직업이 조폭이라 잔혹한 면이 있지만 자기 아픔이 있는 인물이다. 개봉 시기는 다르지만 세 작품의 출연 결정을 같은 시기에 내렸다. 만일 이전의 나라면 매우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세 작품 다 안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놓고 1년 가까이 출연할 지 결정을 못 내렸다. 트란안홍 감독이 답변을 재촉할 때 "배우로서 한국에서도 좋은 상황인데 모험을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어 고민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감독이 무엇을 뽑아내기 위해 나를 택했을까 궁금했다. 좋은 감독과 생각과 정서를 공유해야 겠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렸고, 그 작품을 결정하니 나머지는 두 작품은 쉽게 접근이 되더라. - 할리우드 작품을 연달아 출연하며 외국 생활을 하느라 향수병에도 시달렸을 것 같은데. ▲ '놈놈놈' 때 홍콩과 중국을 오갔고 바로 미국에서 4개월 지내고, 한국에 잠깐 왔다가 프라하에서 또 한 달을 지냈다. 미국에서 촬영할 당시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더라. 결국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반찬을 잔뜩 싸들고 미국으로 오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향수병을 달랬다. -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를 보고 당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데. ▲ 일본 레드카펫 현장에서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 나를 만나자마자 그 얘기를 꺼내더라. 편집을 끝내고 스필버그 감독에게 영화를 보여줬는데 저 동양 배우는 누구냐고 물어봤다는 거다. 어디서 저런 배우를 캐스팅했냐고 물었다며 신이 나서 얘기하더라. 그 자리에서 "스필버그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 이번 영화 이후 할리우드에서의 입지가 더 커질 것 같은데 특별한 목표는. ▲ 원래 기대를 별로 안하는 성격이고 할리우드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안 한다. 큰 일만 생각했다가는 원래 내가 가진 것조차 잃기 쉽다. 우리말로 한국 영화를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고 그게 기본이다. 한국을 기본 무대로 또 좋은 계기가 생기면 할리우드에 가서 잠깐 하고 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동양인들이 그 곳에서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중국 배우나 일본 배우 중 본거지를 옮기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좋은 방법인가에는 의심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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