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3월 23일] 無TV 上八字

집에 TV를 없앤 지 2년이 돼간다. 한때는 우리 집에도 다른 집들처럼 TV가 있었다. 그때는 퇴근해 거실 소파에 앉으면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아이들에게는 'TV 그만 보고 책 읽으라'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나 자신은 습관적으로 시청했다. 거실 소파 앉으면 습관적 시청 TV라는 게 참 묘해서 한번 수상기 앞에 앉으면 잠시 후 자연스레 눕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시답지 않으면 가차 없이 리모컨을 조작해 채널 순례에 나서기 마련이다. 한 가지 프로그램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용이 자극적이지 않으면 어느 새 금방 졸음이 오고 잠이 들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TV 앞에 오래 앉아 있어도 정작 끝까지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하나 있을까 말까다. TV 시청 시간은 길어도 제대로 본 프로그램은 없는 셈이다. 거실에 TV가 있던 시절 기자는 기계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고화질(HD)TV를 구입했다. 요즘은 상황이 좋아졌겠지만 당시에는 고화질을 구현한다는 HDTV를 사 시청을 해도 고화질 프로그램은 어쩌다 한번 가물에 콩 나듯 볼 수 있을 뿐 대부분 프로그램은 흐릿하고 희뿌옇게 나왔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고화질 화면을 송출해도 아파트 단지 케이블 망을 장악한 유선방송사업자(SO)들은 디지털 장비를 갖추지 못한데다 군소 프로그램 공급업자(PP)들도 고화질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프라는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값비싼 HDTV만 가지고 고화질을 즐기겠다고 덤빈 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하지만 당시 기자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유행의 첨단을 좇겠다고 부산을 떨다 봉이 된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SO들이 아파트 단지 케이블 망을 장악하는 방법도 교묘했다. SO 업체는 처음 아파트 단지에 유선방송케이블을 깔 때 한 달 시청료를 500원에서부터 시작했다. '거저나 다름없는 시청료에 수십개 채널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SO와 관리사무소의 설명에 주민들은 아무 생각 없이 유선방송 케이블 아파트 내 구축에 동의했다. 일단 주민 다수결에 따라 케이블 망 구축이 결정되자 요금은 한 달이 멀다 하고 오르기 시작하더니 불과 1년여 만에 5,000원까지 올랐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TV를 봤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비싼 시청료를 내고 TV를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홈쇼핑 프로를 보며 당장 필요 없는 별의별 희한한 아이디어 상품까지 충동적으로 구입하게 됐다. 한두 번 써보다 구석에 처박아놓은 이름 모를 물건이 늘어났고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 돌아오면 홈쇼핑 업체의 로고가 새겨진 골판지 상자를 내다 버리느라 온 가족이 나섰다. 여기까지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시청료를 올려 받은 SO 업체들이 보다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려는 상도의(商道義)의 발로(?)였는지 날이 갈수록 벌거벗은 남녀들이 끌어안고 뒹구는 포르노물 등급의 프로그램을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대는 데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처음에는 늦은 밤에서 새벽 사이에만 트는 것 같더니 언제부터인가 훤한 대낮에도 낯 뜨거운 장면이 송출됐다. 이젠 김연아 경기 못봐도 지낼만 우리 가족은 아직 수양이 덜 됐는지 아니면 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 그런 장면을 아이들과 함께 볼 만한 여유와 인내가 없었다. 그래서 2년 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큰 맘 먹고 TV를 단돈 10만원에 팔아 치웠다. 집사람은 TV를 구입할 때 지불한 액수와 팔면서 받은 10만원의 괴리 사이에 갈등했지만 기자는 TV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2년이 흐른 지금, 우리 가족 중 아무도 TV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김연아의 금메달 연기를 보지 못했고 오는 6월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의 선전도 볼 수 없을 테지만 우리는 TV 금단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이런 처지가 전혀 불편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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