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위기의 불길이 급기야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초우량 국가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구제금융으로 시간을 벌 줄 알았던 유럽연합(EU)의 위기대응 전략이 하루도 안 돼 오산으로 판명되면서 위기의 불길은 이제 스페인은 물론 이탈리아를 넘어 유로존 전역을 넘실거리고 있다. 유럽의 '꼬리'에 불과한 남유럽의 약소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위기가 국내총생산(GDP) 10배인 독일을 비롯해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2일(현지시간)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는 일제히 상승세를 보였다. 앞서 1,000억유로 규모의 은행 구제를 발표한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장중 6.8%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이탈리아 국채 수익률도 올 들어 최고치인 6.26%까지 치솟았다. 스페인 은행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이 스페인에 대한 시장 불안을 진정시켜 국채매각을 통한 정부의 자금조달 여건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EU의 기대는 하루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독일 등 유럽의 초우량 국가들에 대한 시장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스페인 등 위기 국가의 국채 수익률이 오를 때마다 하락세를 거듭해 온 신용등급 'AAA'국가들의 수익률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독일ㆍ네덜란드ㆍ핀란드 등 유로존 전반의 국채 수익률이 일제히 상승세를 나타냈다.
이들에 대한 신용등급 강등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이날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유로존의 정책결정자들이 국채위기 해소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실패함에 따라 유로존 전반의 국가신용등급 강등 리스크가 고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는 독일ㆍ네덜란드ㆍ핀란드ㆍ룩셈부르크 등 'AAA'국가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앞서 지난주 말에는 무디스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시 유로존 전체의 신용등급 강등을 검토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피치의 에드 파커 이사는 "조만간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유로존 붕괴 리스크가 고조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유로존 위기가 초래할 수 있는 세계경제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 표출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은행은 이날 발표한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유로존 위기가 교역과 관광, 시장 신뢰를 침체시키고 있다"며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을 2.5%로 하향 조정했다. 앤드류 번스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는 다시금 매우 위태로운 시기를 맞이했다"며 "만일 당장 유럽 위기가 진정되더라도 세계 경제는 수년 동안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위기 타개를 위해 일사천리로 움직여야 할 유럽 지도층의 리더십이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내놓을 카드도 없는 EU는 유럽중앙은행(ECB)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역내 '금융동맹' 체결과 중앙은행 감독 강화 등을 위기 해법으로 제시하는 ECB가 이에 반대하는 독일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유럽 지도층 간에 설전만 오가고 있다. ECB안을 지지하는 영국의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이날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이탈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독일이 유로화를 지키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인가"라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처럼 유럽 지도층이 위기 해결의 실타래를 좀처럼 풀지 못하는 사이 유럽의 위기해결 능력은 점차 소진돼가고 있다. 크리스티앙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날 CNN과의 인터뷰에서 "3개월 내에 유럽 재정위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재촉했다. 앞서 세계적인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도 이달 초 "9월부터는 독일 경제가 악화돼 유로존 위기 지원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유럽 위기 해결을 위해 남은 시간은 3개월뿐"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