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 禹 錫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동경에서 한 1년 살아보니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고 예의바르지만 가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규칙을 정해놓고 얼마나 철저히 지키는지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처음 은행구좌를 개설할 때였다. 일본에선 여권이나 외국인 등록증이 없으면 절대로 은행거래를 틀 수 없다. 신원확인 원칙은 정말 철저하여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릴 때도 회원증이 있어야 한다. 언젠가 한번 회원증을 안 가져가 비디오 대금만큼 현금으로 예치하고 빌리겠다고 해도 안된단다.
은행통장을 개설할 때 외국인 등록증, 집주소 등을 철저히 확인하고 반드시 도장이 있어야 한단다. 나는 외국인이니 사인으로 대신하겠다고 했으나 안된단다. 동경에선 도장을 파기가 어려워 할수없이 서울에 연락해 도장을 부쳐왔다. 일본 사람들은 다나까(田中), 스즈끼(鈴木)같이 성만 파놓은 나무도장들을 문방구에서 사서 쓰는 것 같았다. 도장을 갖고가 수속을 마치니 캐시카드를 집으로 일주일 후 부쳐 준단다.
일본에선 크레디트카드 대신 캐시카드를 주로 쓴다. 며칠 뒤 연구소 가는 길에 은행지점에 들렀다. 카드를 집으로 부쳤느냐고 했더니 아직 안 부쳤단다. 그럼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안된단다. 내가 바로 그 카드를 받을 당사자인걸 알지 않느냐고 했더니 잘 안단다. 초이(Choi) 상(氏)이 틀림없지만 은행규칙은 규칙이니까 우편으로 부치겠단다. 워낙 규칙을 준수하겠다는 자세가 완강하여 포기하고 나왔는데 며칠 뒤 집으로 카드가 왔다. 그리곤 얼마있다 연구소로 카드를 잘 받았느냐는 확인 전화가 왔다.
그 이야기를 아는 일본사람에게 했더니 당초 그 규칙은 카드를 고객에게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젠 고객은 없어지고 규칙만 남았다고 탄식했다.
요즘 일본은행들의 부실채권이 늘어나 경영이 흔들리는 걸 볼때마다 그때 그 원칙적이던 은행원 생각이 계속난다. 규칙을 철저히 지키기로는 일본은행 못지 않은 곳이 한국에도 있다. 바로 과천에 있는 현대미술관이다.
요즘 거기서 한국 근대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시간을 알아본즉 평일은 오후 6시까지고 공휴일은 7시까지다. 그런데 폐관 1시간 전까진 입장해야 한단다. 휴일은 너무 복잡할것 같아 어느 평일날 서둘러 과천으로 갔다. 도착시간이 5시 6분. 벌써 정문앞 경비소엔 「관람시간이 지났습니다」하는 표시가 붙어 있고 미술관으로 못가게 한다. 6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50분만 보고 6시까지 나오겠다고 해도 규칙이 5시까지란다. 그때 다른 차가 한대 왔는데 그차도 마찬가지로 못가게 한다. 이미 매표소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시간에 올라가게 하면 경비실이 욕을 먹는단다. 차에서 내려 근대미술전만 보고 금방 나올 것이니 좀 올라가자고 사정해도 「잘 아실만한 분이 자꾸 이러시면 어쩌느냐」며 정색을 한다. 꼭 무슨 나쁜 짓을 하려다 야단맞은 꼴이 되어 더 할말이 없었다. 다른 차로 왔던 분들도 6시까지는 나올텐데 한사람이라도 더보면 좋지 않느냐고 거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뒤부턴 다시 현대미술관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