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지난주 세계 최대의 도서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다녀왔다. 미국과 유럽을 덮친 재앙적 경기침체의 충격 속에서도 전시회장은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올해도 출판인들은 인간의 저주받을 탐욕과 디지털 문화의 반성 없는 확산 사이에서 흔들리는 지구의 미래를 위한 수많은 대안들을 쏟아냈다. 중국ㆍ인도ㆍ브라질 등 신흥 강국들은 출판 관계자들을 대량으로 파견해 전시회장 전체를 누비면서 지식과 예술의 첨단 이슈를 확인하고 이를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불황 탓인지 한국 출판계의 움직임은 크게 눈에 띄지 않은 편이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을 비롯해 몇몇 출판사가 부스를 열어 정열적으로 활약하고 저작권 상담도 적지 않았다고 들었다. 인프라웨어 등 전자책 솔루션 업체들이 이곳에서 책의 새로운 전망을 구축하는 거대한 물결에 속속들이 참여해 현지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참여 출판인들의 규모가 많이 줄어든 데다 신규 콘텐츠 개발에 대한 열의도 높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생각의 속도'는 화면과 전선을 통해서도 교환할 수 있지만 '생각하는 힘'은 교육 외에는 거의 책을 통해서만 교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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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도서전은 1960년대의 문고본 유행 이후, 또 하나의 출판 빅뱅이라 부를 만큼 활발했다. 출판은 지난 20년 동안 계속된 디지털 충격을 거의 소화해 이제는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혁신 모델을 과감히 실험 중이다. 종이책 등 오프라인에서 사업을 벌이기 전에 온라인에서 콘텐츠의 온갖 가능성을 실험하는 '디지털 퍼스트'는 출판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인쇄 콘텐츠의 전환을 넘어 동영상ㆍ가상현실게임 등과 결합한 인터렉티브 전자책이 출판의 새로운 영역으로 탐구되며, 메타데이터와 검색엔진을 활용한 마케팅 기법들이 출판의 새로운 툴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출판은 격렬한 변화의 와중에도 자기 핵심을 잊지 않았다. 지성의 높이를 올려주는 고급한 지식과 깊이 있는 정보의 전달, 감성의 깊이를 더하는 우아하고 질 높은 예술의 보급은 디지털시대에도 책이 지킬 중대가치다. 지구 정치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회경제적 모순을 독자들과 함께 탐구하는 출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으며, 책의 디지털화는 이러한 고민과 탐구를 파괴하기보다는 확산하는 통로로 이용되도록 섬세하게 진행됐다.

책의 디지털 미래가 열리려는 이 중요한 순간에 한국출판은 갈지자로 걷고 있다. 서점은 붕괴하고 신간종수는 줄어들고 도서관은 경제논리에 갈 길을 잃고 디지털화는 한없이 더디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처럼 근대국가는 책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한국사회의 미래도 설계할 수 없다. 진지한 논의와 적절한 지원을 통해 출판에 활력을 불어넣지 않는 한 우리는 좀처럼 암울한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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