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묘지가 있는 마당뜰


고고학자들은 흔히 무덤을 발굴해 훌륭한 문화유산을 찾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고고학자라면 '무덤 파는 사람'이라고 선입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무덤 백100기를 발굴해도 사람 뼈의 흔적이 있는 것은 하나 아니면 둘이다. 그 정도로 우리의 땅은 좋아서 유기물은 쉽게 부패되고 잘 남아 있지 않다. 선현들도 자연의 순환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양지바르고 땅속에 바람이 통하는 곳을 명당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무덤을 발굴해 사체의 일부라도 남아 있는 경우는 바람직한 묘 자리가 아니다. 고고학자들에게 재수 좋은 무덤은 결국 죽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좋은 누울 곳이 못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장례 대세는 화장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후대의 고고학도들은 할 일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장례문화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빽빽한 아파트군 사이에서 질식할 듯 살아온 것이 우리의 지난 수십 년 생활사이다. 그리고 경작지가 줄어든다고 매장을 억제하고 화장을 장려해왔다. 이제 수목장을 크게 장려한다는 정부의 새로운 방침을 들으니 이왕 내친 김에 새로운 장례문화를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래 전 태평양의 마이크로네시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방문한 집의 앞 마당에 백합 같이 생긴 열대 꽃들이 네모난 화단 속에 소복이 피어 있었다. 그곳은 집주인의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곳이란다. 원래 묻혀 있던 할아버지의 뼈를 관의 한쪽으로 밀어두고 아버지를 묻었다 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공간에서 교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선대에도 시골집 뒤에 산소가 있었고 동리의 먼 발치에서도 조상의 온기를 느끼면서 살아왔던 기억이 아련하게 향수로 남아있다. 오늘날 한국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생활화하는 길이 아닐까. 우리의 도시는 회색 공간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사는 '살아 있는' 사람만의 공간이다. 죽음도 세상사의 중요한 부분이고 삶을 더욱 값 있게 만들 수도 있는데 우리는 죽음에서 배우고 느끼기를 거부하는 사회처럼 보인다. 우리가 도시를 개발할 때 '사자(死者)'를 위한 공원을 따로 만들어서 수목장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공원도 생기고 장소의 스토리도 만들어질 것이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고 다음 세대에게도 마음으로 가르치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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