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설] 일단락 된 디노미네이션 논의

한국은행이 추진해온 고액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가 절하) 문제에 대해 박승 한은총재가 시기상조임을 자인하고 논의 철회의사를 밝힘으로써 일단락 됐다. 국민경제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몰고 올 이들 사안을 둘러싸고 그 동안 한은과 재정경제부 사이는 물론 학계와 연구소 등 민간에서도 이견이 분분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할 만큼 한가하냐”고 보다 분명한 어조로 정부의 반대의사를 밝힌 것이 논의를 일단락 짓는 계기가 됐다. 고액권 발행이나 디노미네이션 문제가 거론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고 나름대로 근거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화폐제도가 도입된 이후 우리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고 화폐의 기능과 역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 웬만한 경우 몇십억 몇백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일상화되다시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달러에 대한 교환비율등에서 우리나라의 화폐단위가 지나치게 낮은 감이 없지 않다. 사실상 고액권으로 유통되고 있는 수표의 발행비용 등을 줄이는 측면에서도 고액권 발행 방안을 검토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액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적으로 화폐개혁에 상응하는 충격과 변화를 몰고 오게 될 뿐 아니라 부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론적으로는 경제활동에 산술적인 변화만 가져올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경제에 상당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주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가령 1만원짜리를 1,000원짜리로 디노미네이션 했을 경우 신규 1,000원이 구 1만원의 구매력을 유지할 것이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투기가 상존해 있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은 나라에서는 신권 1,000원은 과거 1,000원으로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디노미네이션의 긍정적인 효과 보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커지게 된다. 아울러 우리처럼 사회전반의 투명성이 낮고 부정부패가 심한 경우 뇌물액수를 부풀리고 부패에 대한 감시를 어렵게 할 우려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액권 발행이나 디노미네이션 문제는 교과서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우리경제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에 대한 주도 면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 단순히 수표의 발행비용을 줄이는 것과 같은 지엽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화폐는 그 나라 경제에 대한 신용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일본과 같은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고액권이나 디노미네이션을 하지 않은 것은 자국 화폐의 가치와 권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에서 화폐는 단순한 교환수단이나 가치저장수단을 넘어서는 것이다. 산술적이고 교과서적인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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