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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시트(Grexit:Greece+exitㆍ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공포에 이어 스페인 은행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에 뒤덮인 유럽이 '시계제로'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스의 대규모 예금인출(뱅크런)이 가시화한 지 불과 이틀 만에 그리스발 위기는 스페인을 비롯해 재정이 취약한 주변 국가들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거센 긴축 반대로 유럽 재정위기의 불을 다시 지핀 당사국인 그리스 정치권은 "유럽에서 돈줄이 끊기면 채무를 갚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반(反)긴축 목소리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유로존 탈퇴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긴축재정 반대를 외치던 그리스 여론은 주춤해졌지만 그리스 2차 총선이 열리는 다음달 17일까지 그리스와 유로존 국가들은 출구 없는 혼돈 속에서 피 말리는 한 달을 맞이하게 됐다.
◇스페인ㆍ키프로스…사방으로 튀는 그리스 불똥=스페인의 페르난도 히메네스 국무장관은 17일(현지시간) 스페인 3대 은행인 방키아에서 지난 한주간 10억유로 규모의 뱅크런이 발생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를 부인하기 위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방키아도 이날 오후 성명을 통해 예금 감소는 뱅크런이 아닌 계절적 요인에 따른 현상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스페인 은행 시스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도 스페인 은행들과 지방정부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강등하며 시장의 불안을 부추겼다. 영국의 일간 인디펜던트는 스페인 금융기관들이 떠안고 있는 부실채권이 1,000억유로에 달할 수도 있다는 시장 관측과 함께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뱅크런으로 이어지며 이들 국가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우려 속에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6.31%로 올라섰고 이날 실시된 25억유로 규모의 국채 입찰에서도 3년 만기 발행금리는 4.375%에 달해 지난달 발행 당시의 2.89%를 크게 웃돌았다.
차기 구제금융국 후보로 이름을 올려왔던 키프로스에 대한 우려도 다시 불거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키프로스가 그리스 국채 상각손실을 입은 포풀라르은행의 대규모 신주발행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며 2008년 유로존에 가입한 그리스의 구제금융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시리자, '배째라'식 강경대응=재정위기의 불길이 빠르게 번져갈 조짐을 나타내는 와중에 위기의 진앙지인 그리스는 반(反)긴축의 강경발언이 점차 수위를 높여가며 그렉시트 우려를 부추기고 있다. 6일 총선에서 급부상하며 차기 총리 후보로까지 이름이 거론되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이 그리스로의 자금줄을 막을 경우 그리스는 채무변제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날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에 대해 구제금융 조건 이행을 요구하며 일부 은행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중단하자 아예 '배째라'식 강경대응에 나선 것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를 위해서는 긴축 이행이 불가피하다는 유럽연합(EU) 등의 입장과 유럽 재정협약 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걸며 긴축재정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시리자의 대립이 점차 심화하는 가운데 관건은 2차 총선까지 남은 한 달 동안 그리스의 표심이 어디로 흘러갈지 여부다. 현지 여론조사업체 마크ㆍ알파가 15~17일 벌인 여론조사 결과 1차 총선 이후 줄곧 최고 지지율을 확보했던 시리자가 2위로 내려앉은 반면 구제금융 조건 이행을 약속한 신민당이 26.1%의 득표율로 제1당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나타났다.
6일 총선 이후 한결같이 반긴축을 요구해온 그리스 여론이 막상 유로존 탈퇴가 가시화되자 슬그머니 긴축을 용인하는 쪽으로 돌아선 가운데 유로존의 운명은 그리스 2차 총선이 열리는 다음달 17일 또 한번의 분수령을 맞이하게 됐다. 이날 그리스에 대한 신용등급을 강등한 피치는 다음달 총선 결과에 따라 유로존 모든 국가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강등할 가능성을 언급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도 그리스와의 접촉을 총선 이후로 미루는 등 국제시장의 이목은 그리스의 표심의 향방으로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