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6일 오후2시5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협공해 들어갔다. 4차 중동전쟁 개막. 기선은 ‘사상 최고의 작전’으로 기억될 만큼 완벽한 수에즈운하 도하작전을 펼친 이집트가 잡았지만 개전 5일 후부터 전세가 뒤집혔다. 결국 이스라엘의 우세 속에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0월26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신무기가 총동원된 ‘10월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미국제도, 소련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석유였다. 아랍 산유국이 ‘석유’ 카드를 내민 것은 ‘전세역전’이 확인된 10월16일. 배럴당 2.6달러~3달러선인 유가를 5.11달러로 인상하고 매달 5%씩 감산한다는 발표에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유가는 12월 11.65달러로 뛰고 현물시장에서는 22.6달러라는 입찰가도 나왔다. 영국은 공장가동을 월 3주로 제한하고 한국과 일본은 친아랍정책으로 돌아섰다. 한겨울에 서머타임제를 도입한 미국의 유류난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빠져 있던 닉슨 대통령의 지지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이듬해 3월 금수조치 해제 후에도 계속된 유가 상승의 혜택은 누가 봤을까. 산유국? 노(No)! 석유 메이저와 일본이다. 절약분위기 속에서 일제 소형 자동차와 절전형 가전제품이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산유국들의 석유수출 수입이 1972년 230억달러에서 1977년 1,400억달러로 늘어났지만 달러가치 하락 탓에 실질 수입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오늘날 석유시장 구도는 더욱 복잡하다. 중동 산유국의 입김이 약해졌으나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한 수요가 새로 생겼다. 한국은 예전에 누렸던 중동건설 특수 같은 돌파구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석유자본의 이익구조와 유가 오름세뿐이다. 국제유가는 정녕 100달러까지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