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구려사를 소재로 한 텔레비전 사극이 잇따라 방영된다는 소식이다. 이미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일대기인 ‘주몽’이 시작됐고 잇따라 광개토태왕과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주몽’에는 소서노(召西奴)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서노는 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해 백제를 건국한 우리 고대사 최고의 여걸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이처럼 대단한 여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가. 역사 교육이 잘못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숱한 전란으로 대부분의 역사 기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서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도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 겨우 몇 줄 실려 전해온 덕분이다.
동명성왕을 도와 만주에서 고구려를 건국했고 비류ㆍ온조 형제를 이끌고 한반도 중부로 망명해 백제를 건국했던 실질적 여왕 소서노, 나라를 하나도 아니고 두개나 만들었던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여걸이 바로 소서노였다. 흔히 주몽으로 널리 알려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본명은 추모(鄒牟). 일세의 영걸 추모가 동부여에서 졸본 부여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추모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라, 고조선과 부여의 뒤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를 건국하는 원대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 만난 여인이 바로 소서노. 나이는 비록 8세 연상이요, 두 아들을 둔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이 졸본 부여에서는 가장 강력한 토착세력인 계루부의 족장이며 대부호였던 것이다. 우태에게 시집갔다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소서노의 눈앞에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첫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추모의 빼어난 인품, 준수한 용모, 늠름한 기상, 그리고 백발백중하는 신기(神技)의 활 솜씨에 그 당시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았으랴.
추모는 그렇게 연타발 부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 삼아 더욱 많은 인재와 백성을 끌어모아 지지세력을 키우며 건국사업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연씨 부녀의 재산과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또한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7년 10월, 만 22세의 추모는 마침내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국력이 강해지고 대왕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자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떠올랐다. 대왕은 아직도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소서노는 대왕에게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나중에는 들은 척도 않았다. 이미 애정이 식어버렸던 것이다. 사랑에 속아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뼈저리고 살 떨리는 절망감을 그 누가 알아주랴.
대왕은 본처 예씨와 적자 유리가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서노는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ㆍ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으랴. 그렇게 해서 세 모자는 고구려를 떠나 멀리 남쪽으로 가서 신천지를 개척해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게 됐던 것이다. 그것이 서기전 18년 10월이라고 ‘삼국사기’ 등 사서는 전한다.
사극 드라마든, 역사소설이든 서민 대중의 역사 인식을 드높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특히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따른 고구려사 탈취 기도에 맞서서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고구려사를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소서노의 일생을 연구하고 일대기를 쓴 필자로서 노파심에서 한마디 한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든다는 미명 아래 없었던 일을 사실인 듯, 있었던 일은 없었던 듯이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는 지난해에 방영됐던 ‘불멸의 이순신’에서 거북선이 진수되던 날 침몰했다는 황당무계한 망발에서도 여실히 증명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