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기업가정신이 창조경제 만든다] <9> 노사화합

위기때 빛 발한 '한솥밥 문화'… 기업 비약 성장 이끌어내<br>창업 1세대 "나는 부유한 노동자 일 뿐" 근로자 고충 이해… 감원보다 고용 유지<br>인화정신 바탕 복리후생 확대에도 앞장 상생 패러다임을 재도약 원동력 삼아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8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영빈관 앞 잔디밭에서 현장 관리자들과 둘러앉아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스스로 '부유한 노동자'라고 자처하며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기를 즐겼다. /사진제공=현대중공업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지난 1980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한 강연에서 '노사 한솥밥 식구론'을 제안했다.

최 회장은 당시 "기업의 구성원은 사원ㆍ과장ㆍ부장ㆍ임원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운명공동체 구성원이다.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다. 한 식구가 합심해 제품을 만들고 싸움은 밖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대한석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할 때도 "기업의 구성원은 인체의 오장육부처럼 모두 필요한 존재라 손쉬운 해고 대상이 아니다"라며 수천명의 직원을 모두 SK 가족으로 포용했다.

이 같은 '한솥밥 문화'는 SK가 에너지ㆍ통신ㆍ반도체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짧은 기간에 세계가 놀랄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한 데는 이처럼 노사 간 화합이 큰 힘이 됐다. 특히 선대 기업인들은 창업 이후 적지 않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대량 감원에 나서기보다는 고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비용 절감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노사 화합의 전통을 만들어왔다. 노와 사가 공동운명체라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노사관계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의 '노사 간 협력'은 전체 144개국 가운데 129위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창업세대의 노사 화합 전통을 이어받아 협력과 소통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 기업 및 국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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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철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홍보본부장은 "상당수 창업 세대들은 낮은 데서 출발해 근로자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피부를 맞대며 근로자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했다"며 "이 같은 소통과 친근함이 노사 화합으로 이어져 기업 성장에 한몫을 했다"고 설명했다.

◇근로자에 대한 애정이 노사 화합으로 이어져=실제로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스스로 "나는 성공한 자본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표현하며 사원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특히 근로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직원과 씨름ㆍ배구 등을 함께하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신입사원 수련회에도 빠진 적이 없었다. 정 명예회장은 회사 건물에 사장 등 중역용 엘리베이터를 따로 놓자고 한 직원을 면박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현대는 나와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기능공들, 그리고 모든 임직원들이 함께 만들었으니 근본적으로 우리는 다 같은 동지라야 한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엎질러진 쇳물' 사건도 유명한 일화다. 1977년 4월 새벽 포항제철소 제1제강공장에서 크레인 운전공이 졸면서 운전하다 100톤이나 되는 쇳물을 공장 바닥에 쏟아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공장 전선의 70%가 불에 탔고 막대한 재정적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출장 중 급히 귀국한 박 명예회장은 크레인 운전공에게 "이 일은 내가 책임진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한다. 너는 열심히 일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고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의 경영철학인 '인화(人和)'는 지금까지도 두산그룹의 경영이념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는 생전에 "하늘이 도움을 주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땅에서 이익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고, 땅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인화만 같지 못하다"는 옛말을 즐겨 인용했다. 인화정신을 바탕으로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신경을 쓴 박 회장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회사 야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빛나는 노사 화합 전통=이 같은 노사 화합의 전통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빛났다. 동국제강은 1994년 대기업 최초로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했고 그 저력을 바탕으로 외환위기 때도 정리해고 등 인위적 구조조정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고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은 1997년 포항에 주력 철강공장을 짓고 있을 당시 외환위기가 터져 팀장급 이상 직원들이 사표를 모아 오자 "반지를 팔아서라도 제대로 된 공장을 짓겠다. 여러분을 거리로 내몰 수 없고 (인적 구조조정이 없다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한때 극렬한 노사분규의 대명사였던 현대중공업은 지금까지 '18년 연속 무쟁의' 기록을 세우며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2005년 6월 기존의 투쟁 지향적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노사 상생의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새로운 이념과 강령을 대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지속적인 무분규를 예고한 바 있다. 이에 회사도 업계 최고 수준의 후생복지와 꾸준한 고용안정정책으로 적극 화답했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은 글로벌 조선업계 불황 속에서도 세계 1위 조선사의 명성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1987년과 1989년 두 차례의 노사분규를 겪은 LG전자도 1993년에 기존 수직적 개념의 노사관계 대신 수평적 개념의 '노경(勞經)관계'라는 고유개념을 도입해 혁신적인 '노경공동체'를 구축해오고 있다.

이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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