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7일] 황금천 들판의 회담


1520년 6월7일, 프랑스 서북부 발 도레. 영국의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만났다.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정상회담이라는 ‘황금천 들판의 회담(Meeting on the Field of Cloth of Gold)’이 시작된 순간이다. 캐서린 왕비를 포함한 5,700여명의 수행원과 3,000여마리의 말을 싣고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 내 영국령 귄으로 들어온 헨리 8세는 들판이 온통 황금으로 보일 만큼 수많은 천막을 금으로 발랐다. 연회장으로 쓰려고 146평짜리 천막도 세웠다. 헨리 8세가 타는 말을 치장하는 데도 56㎏의 금이 들어갔다. 연간 가용예산이 11만파운드였던 영국은 이 행사를 위해 적어도 5만파운드 이상을 지출했다고 전해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거액을 들여 호화판 정상회담을 가졌을까. 프랑수아 1세는 숙적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이 필요했다. 오랜 내전(장미전쟁) 끝에 등장한 튜더왕조의 두번째 왕인 헨리 8세는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강대국 프랑스 국왕과 대등한 군주임을 증빙할 수 있는 이벤트를 원했다. 두 개의 분수대가 적포도주를 뿜어내는 가운데 두 국왕이 레슬링까지 하며 우의를 다졌던 17일간의 회동 결과는 영국의 승리. 프랑스의 애를 태우며 동맹을 맺지 않은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더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영국 수출품의 주력인 양모의 90%가 에스파냐 치하의 네덜란드로 팔려나간다는 점에서 영불동맹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국익을 위해 고착된 동맹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유럽대륙의 각국과 합종연횡한다는 영국 외교정책의 전통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요즘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해마다 재연되는 488년 전 황금천 들판 정상회담의 밑바탕에는 약자의 실용외교 노선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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