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차이인가, 경제환경의 차이인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해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서로 다른 금융정책을 펼치고 있다. FRB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금리를 인하하는 반면에 ECB는 1년 가까이 금리를 동결한채 유동성을 풀어 신용경색을 풀어나가고 있다. FRB는 모기지 부실에 따른 경기침체 저지에 주력하고, ECB는 인플레이션 억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선진 경제권의 양대 중앙은행이 이같이 엇갈린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 클로스 트리셰 ECB 총재는 지난 14일 뉴욕대에서 열린 경제정책포럼에 참석해 "유럽도 금융시장의 리스크가 불확실한 상황인 것은 미국과 마찬가지지만, ECB는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리셰 총재의 발언은 ECB 정책의 초점은 인플레이션 억제에 있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ECB의 금리정책 기조는 연이은 금리동결 조치로 나타난다. 유로를 공동통화로 사용하는 유로존의 지난 3월 인플레이션 상승률은 16년만에 최고치인 3.5%에 달했고 국제 식품 및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유럽의 물가상승에 불이 붙고 있다. 이에 유로존 15개 가입국의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ECB는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선포, 지난 10일 금리를 10개월째 연속 4.00%로 동결했다. 이에 비해 FRB는 지난해 9월 이후 지금까지 6차례에 걸쳐 연방 기금금리를 3.00%포인트 대폭 인하하며 적극적인 금리 인하조치를 단행했다. 오는 5월 1일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책 회의에서도 FRB는 0.5%포인트 추가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처럼 두 중앙은행이 대조적인 정책을 구사하는 배경에 대해 해석이 구구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FRB와 ECB가 중앙은행으로서 추구하는 역할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FRB는 가격안정을 통한 고용 극대화가 최우선 사안으로 삼는데 비해 ECB는 인플레이션을 목표치 이하로 유지하는 등 통화관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 미국과 유로존의 경제상황이 다른 것도 정책 차이를 보이는 요인이다. 미국은 경기침체 국면을 맞아 경기부양과 내수진작을 꾀하지만 유로존은 점진적인 경기하강 리스크에 놓여 있을 뿐 경기 침체로 빠질 우려는 없다. 유로존이 미국의 금융위기에 노출되기는 했지만 미국과 공조한 유동성 공급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향후 자금흐름에도 문제가 없다는 게 ECB의 주장이다. 아울러 미국과 유럽의 금융업계 구조가 다르다는 점도 지적됐다. 미국에서는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구분이 엄격하지만 유럽은 일반은행의 예대업무와 증권업무가 포함돼 있는 겸업은행(universal banking)이 정착돼 있어 금융쇼크의 손실이 상당 상쇄된다는 분석이다. 크리스천 노이어 프랑스은행 이사는 "겸업은행제가 부분적으로 신용경색에서 비롯된 피해를 일부 차단하는 방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또 주택가격이 폭락하면서 가계자산이 급격히 감소해 금융위기가 확산된 반면 유럽의 경우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부동산 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이다. 또 경제정책의 우선을 어디에 두는지도 FRB와 ECB가 인플레이션 관리에 다르게 대처하게 된 근거로 꼽힌다. 미국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유로존의 평균치보다 높은 4%수준이다. 하지만 FRB는 미 경제의 탄력성과 미래 생산력 증강으로 인플레이션은 통제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FRB가 정작 우려하는 것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는 원자재 가격으로 인한 수급불안이다. 반대로 ECB는 지난해 9월이후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를 가파르게 뛰어넘자 물가상승-비용상승-임금인상 정체로 이어지는 물가ㆍ임금의 악순환을 우려하고 있다. 줄리안 캘로우 바클레이즈 캐피탈 애널리스트는 "FRB와 ECB는 성장저해 요인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각차를 드러낸다"며 "이는 나아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파생한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해석했다. FT는 "미국은 성장둔화를 은행의 주택담보 채권의 가치하락 등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간의 상호작용을 보지만 ECB는 가계저축 감소 등 경제지표의 불균형 여부로 경기진단을 판단한다"고 전했다. 과거의 경험도 중요한 잣대다. 미국은 이번 서브프라임 부실이 촉발한 금융위기가 지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사태로 인식하고 일본식 장기불황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럽은 193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사태를 경험한 만큼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으로 치는 보수적인 성향의 '신중파'에 가깝다는 관측이다.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두 중앙은행에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석했다. 유니크레딧의 마르코 애넌지아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정책 다양화의 측면에서 글로벌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통제하고 미국발 신용위기를 수습한다는 측면에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수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중앙은행이 정책결정에서 보다 유기적인 공조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않다. 찰스 달라라 국제금융연합회(IIF) 이사는 "중앙은행은 자국 경제를 우선적으로 관리하되 공동 대응으로 세계 경제안정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