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과 세상] 한·중·일 군주는 어떤 관상 가졌을까

■ 왕의 얼굴 (조선미 지음, 사회평론 펴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유력 대선주자들의 관상에 대한 얘기 또한 술자리 단골 메뉴로 오르곤 한다. 왕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인 동시에 구중 궁궐 속 신비주의의 대상이기에 그 얼굴에 대한 궁금증은 예부터 높았다.

저자는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을, 나아가 아시아를 지배했는지를 한국ㆍ중국ㆍ일본의 군주 초상화를 비교하며 살펴보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여러 사찰이 영전을 두고 왕의 초상을 봉안했었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979)의 초상은 경주 숭혜전(崇惠殿)에 후대에 모사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5점이나 있다. 고려에 항복한 비운의 왕이지만 넉넉한 얼굴 생김은 신라의 미륵불과 닮았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초상화는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경기도 연천 숭의전(崇義殿)에 소장되던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약간 돌린 오른쪽 얼굴을 그린 태조 어진(御眞)에 따르면 왕건은 다소 투박하게 생긴 그러나 예민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로 표현돼 있다. 반면 고려 공민왕(1330~1374)은 부인인 노국공주와 나란히 등장하는 부부상이 전해진다. 인물 자체의 성격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후대까지 부부초상화의 모범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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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시대 왕의 얼굴에서는 극단적인 사실감이 중시됐다.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以 便是他人)'라는 정확성에 대한 추구가 어진에 반영됐다. 그림이 묘사하려는 대상 그 자체로 보이게끔 제작돼야 했으며, 이 같은 노력의 이면에는 왕의 초상이 왕권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조형물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을 보면 앉아 있지만 키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가 그의 초상을 보고 지은 찬문에도 '풍채가 호걸스러운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태조는 귀가 큼직하고 두툼하지만 코는 그다지 우뚝한 편이 아니고, 눈과 입도 아담하며 광대뼈가 약간 나와 있다. 노인 임에도 눈은 정기로 가득 차 있어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이 가득하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는 어진이 많이 제작됐으나 왕자이던 연잉군 시절의 초상과 51세 때의 어진 만이 전해진다. 21세 때의 모습을 그린 연잉군 초상은 인물의 영민함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무수리 신분 숙빈 최씨의 몸에서 태어나 궁중 암투로 앞날이 불투명한 영조의 불안함도 보여준다. 반면 왕으로서 조선의 전성기를 다스린 50대의 영조 얼굴에서는 젊은 시절의 조심스러움이 자신감과 권위로 바뀌어 있다. 코는 조각처럼 오뚝하고 눈꼬리는 다소 처져 있지만 날카로우며 빠른 하관과 숱 적은 수염이 그 깐깐한 성품을 보여준다.

조선의 어진이 사실감을 중시한 데 반해 중국은 선전용 수단으로, 일본은 추모와 애도의 성격이 짙다는 차이점이 있다. 2만3,000원.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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