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패러다임 변하고 있다/서상녹 중기연구원장·경박(시론)

올해들어 한보, 삼미, 진로, 대농이 무너져 내렸고 기아가 벼랑끝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가 했더니 쌍방울도 흔들리고 있다. 앞다투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아직도 몇몇 재벌은 여전히 부도설의 풍랑을 타고 있다. 필자는 차입경영에 의존하는 이러한 한계재벌의 붕괴를 경제의 패러다임 시프트 안에서 이해한다. 즉 경제의 패러다임이 「대」에서 「소」에로 이행하고 있는 바, 한계재벌의 붕괴를 이 패러다임 시프트의 이면현상으로 해석한다.경제의 패러다임이 「대」에서 「소」에로, 즉 「중소기업형」으로 이행하도록 촉진하는 시장의 힘은 수요와 공급의 양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수요면에서는 글로벌 경제에 있어서의 환경변화의 급속성과 수요의 개성화 및 다양화가 소규모의 경제와 조직 규모의 최소화를 촉구한다(관료적인 타성에 젖은 대규모 조직은 다양하고 신속하며 세분화된 시장변화에 민첩성과 순발력을 갖고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급면에서는 정치한 정보기술로 장비된 유연생산시스템의 발달이 소규모(다품종 소량생산)의 경제성을 보장해 준다. 이것이 중소기업형 패러다임 시프트를 밀어주는 수급양면의 모멘텀이다. 이제 대기업은 조직을 쪼개어 중소기업형 조직으로 분사화, 이를 관계망화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창의적 혁신능력, 시의적절한 시장접근능력, 의사결정의 순발력으로 급변하는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중소기업형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미국은 대체로 80년대에 「기업관료제도에 의한 경제」로부터 「창업가에 의한 경제」로 극적인 변신을 이룩하였다. 미국 수출품중 50%이상이 종업원 19인이하의 중소기업이 만들어 낸 것이다. 5백명 이상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은 미국 수출액의 7%를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1993년도 「포천」지가 선정한 5백대 기업이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0%로 1970년의 20%에 비하면 대단한 하락세다. 미국경제의 90%는 이미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의 몫이다. 독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중소기업이 전체생산의 70%정도를 지배하고 있다. 한계재벌들이 붕괴되고 있지만 한국경제는 아직도 대기업의 비대화현상이 지나치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경제는 새로운 창업가들로 판이 짜이고 있는 세계경제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대기업들의 양적인 성장이 한국경제를 이끌게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타성이다. 진취적 기업가정신의 본바닥인 중소기업이 경제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과다한 차입경영을 하면서도 슬림한 중소기업형 조직의 연합구조로 변신하지 못하는 한계재벌은 도태되어야 한다. 변화의 흐름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무너져 내리는 대기업의 더미 밑에서 풀뿌리 중소기업의 새싹들은 돋고 있다. 특히 신세대들이 일으키고 있는 벤처기업들이 가장 희망에 찬 새싹들이다. 옛날의 젊은 세대는 대기업이라고 하는 조직에 「귀속」하는 것 자체를 긍지로 삼았다. 그러나 요즘 신세대들은 대기업에 근무하면서도 독립창업가로서의 꿈과 역량을 키운다(대기업은 이러한 예비창업가를 활용하기 위해 사내 벤처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신세대의 역동적인 창업신풍은 혁신능력이 제 힘을 발휘하는 벤처기업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정보통신, 영상, 엔지니어링, 국제금융, 기획, 패션, 디자인 등의 업종이 대표적인 신풍지대다. 이들 업종은 대부분 지식산업이라고 부르는 「소프트」분야에 속한다. 산업의 신진대사나 산업구조 조정면에서 볼 때 매우 소망스러운 현상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수원 등의 7대 대도시에 올 7월 한달동안에만 1천9백76개의 새로운 기업이 탄생하였다. 한국은행은 올 상반기(1∼6월)중 7대도시에서 기업활동에 들어간 신설법인수를 1만1천1백30개로 집계하고 있다. 이것은 국내경기가 나쁘지 않았던 96년 상반기의 신설법인수 9천3백9개보다 약 20% 증가한 수준이다. 올해의 전반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창업붐은 이와같이 대단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최근의 창업열기는 더욱 뜨겁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6월 및 7월의 부도법인 대비 신설법인 비율은 적어도 4배 이상이다. 1개 기업이 부도날 때마다 4개이상의 신설기업이 태어난다는 것은 산업신진대사가 매우 활발하다는 이야기다. 전체 국가경제가 중소기업형 패러다임 시프트를 겪고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패러다임 시프트는 이미 선진국들이 경험한 현상이다. 칼럼니스트 C씨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IBM, GM, GE 등의 대기업들이 각각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에 이르는 대량감원을 하던 기업리스트럭처링의 시기에 창의적인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이 6백만개나 생겨나 무려 1천3백만명의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었다고 한다. 글로벌 경제안에서 분명히 중소기업시대는 도래하고 있으며 한국경제에도 그 여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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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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