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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림을 닮았다. 아니, 그림이 사람을 닮았다. 백발을 덮은 흰 모자부터 티셔츠와 바지, 하얀 운동화까지. 백색 톤의 작품이 현신(現身)한 듯하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백색화가' 정상화(83). 경기도 여주 작업실에서 만난 '허연' 작가가 손님을 맞기 위해 청소했다는 '푸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때마침 잘 익은 '새빨간' 보리수 열매를 한 움큼 따다 건넨다. 온통 하얀색뿐인 침묵하는 작품에서 꿈틀대는 생명력이 감지되는 이유는 이처럼 작가가 흰옷 아래 품고 있는 푸르고 붉은 정성과 열정 때문인가 보다. 뜰 한쪽 편 작은 연못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움직일 때마다 비늘이 제각각 빛을 내 한 몸통에서 여러 색이 느껴진다. 그 녀석마저도 주인장의 그림을 닮았다.
정상화의 흰 그림에 얽힌 일화가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1979년 그해에는 유독 흰색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마침 국내 전시가 잡혔다.
"캔버스만 돌돌 말아 29점을 들고 왔는데 입국장 세관원이 뭐냐고 묻더군요. '내 그림입니다' 했더니 한참 뒤적이더니만 '그래, 작품은 어디 있습니까?' 하더라고요. 허허, 말문이 막혀 서 있었더니 바쁘다는 듯 가라더라고요. 이건 보이는 걸 그린 그림이 아니잖아요.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거잖소."
일명 '모노크롬'이라고도 불리는 한국의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 화단을 이끌었던 사조다. 형태와 구상성을 배제한 단색 추상화라는 점에서는 전후 1950~1960년대 서양의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유사하게 보인다. 도널드 저드, 루치오 폰타나, 이브 클랭, 프랭크 스텔라 등 지금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있지만 객관적·비인격적인 그들의 작품과 달리 우리 단색화에서 중요한 것은 단일한 색조보다 물질을 정신세계로 승화시킨 반복적 행위의 지속, 즉 사람의 행위와 그림의 하나 됨에 있다. "묵언수행에 가까운 반복적 행위가 단색화"라고 하는 정상화의 작품은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 이전에 과정을 알아야 그 안에 깃든 혼(魂)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뜯어내고 메우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우선 캔버스 위에 약 5㎜ 두께로 고령토를 초벌 칠하고 일주일쯤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린다. 그런 다음 마른 캔버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세로로 접는다. 마른 흙이 접힌 선을 따라 균열을 일으킨다. 작가는 금 간 고령토 조각을 하나씩 들어내고 그 자리에 아크릴 물감을 얹는다. 균열은 때로 조선백자의 빙열(氷裂) 같고 한 알씩 두는 바둑판과도 흡사하다. 덜어낸 것은 세속적 욕심이요, 메워 넣은 것은 시공을 초월한 작가정신이다. 하나하나 비우고 채우기를 최소 여섯 번에서 열 번씩 반복한다. 그러니 작품 한 점에 짧게는 2개월,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그냥 들어내고 무작정 남겨놓는 줄 아오? 남길 것과 떼낼 것이 확연히 구별돼 내 눈에는. 뜯고 메우는 과정은 새로운 공간 형성의 과정이거든. 평평해 보이지만 겹이 달라 높낮이가 있고 한 색이라 해도 한 색이 아니에요. 가까이 와서 봐요, 흰색 속에서도 조금씩 톤이 달라요. 그래야만 색의 움직임 안에서 긋지 않은 선(線)이 드러나고 공간이 생겨나는 거니까."
화가들이 2차원 평면 속에 3차원 공간감을 구현하는 것은 수천년 이어온 숙제였다.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 루치오 폰타나의 경우 캔버스를 칼로 찢거나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공간주의'를 실행했다. 서양의 폰타나가 빠르게 직접적 행위로 공간을 '만든' 결과의 예술이라면 동양의 정상화는 느리게 에두르는 정신적 메움으로 공간이 '생기게' 하는 과정의 예술이다.
"시간이 걸려 드러나고 숨기고 감춘 미덕이 여운으로 우러나는 게 동양 그림의 맛이죠. 하루는 고향 마을의 울퉁불퉁한 담장이 눈에 들어왔어요. 쩍쩍 금이 가 있어도 절대 안 무너지는 그 벽에서 미술을 발견했어요. 비뚤비뚤한 제주 돌담도 그렇고 한국의 석조기술은 질박하면서도 조형성이 기가 막히죠. 돌과 흙을 쌓은 데서 내 속의 현대성을 찾아낸 겁니다. 우리 민족은 서툰 데서 익어나오는 사람들인지라 서둘러 금방 나오는 건 우리 것이 아니에요. 기둥을 박을 때 못 하나로도 세울 수는 있지만 튼튼히 지탱하려면 6개를 쳐야 제대로 박힌대요. 내 그림도 최소 여섯 번은 비우고 또 채웁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그는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미술에 관심이 없었다. 미술교사가 없던 시골학교라 사실은 미술을 몰랐다. 어느 날 복도를 지나다 하얀 석고상에 이끌려 교실로 들어간 게 계기였다. 운명이었다. 석고 데생 소모임에 끼어 배우지도 않은 그림을 매일 그렸다. 열정이 대단했다. 깡통으로 만든 간이난로에 불을 피워 언 물감통을 녹일 정도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처음 미술 선생님이 부임했다.
"대학 갈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서울대 회화과에 지원했어요. 입시 문제가 '사과 다섯 개를 배치해 그리라'는 거였는데 세잔의 삼각구도가 생각나 제법 그렸죠. 다 그리고 보니까 너무 딱딱한 게 사과가 아니라 당구공 같아 '석고 데생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한숨을 쉬었는데 '열심'이 통했던지 붙었어요. 장학금으로 학교 다니고 국정교과서에 삽화 그리는 아르바이트로 재료비를 벌었죠. 졸업 앞두고 학장이시던 장발(1901~2001년) 선생이 대학원에 가라 하셨는데 고향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겠다 했더니 이튿날 인천사범학교에 추천해 주셔서 곧바로 취직했죠."
첫 학교에서 7년, 이어 서울예고와 이화예고에서 6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편을 잡았으나 자신의 붓도 놓지 않았다. 대학 때는 구상화를 주로 그렸으나 점차 추상미술로 옮겨갔다. 특히 그가 몸담았던 1960년대 '현대미협'에서는 전후 아픔을 승화한 앵포르멜(비정형 추상회화)과 추상표현주의가 화두였다. 그림에 미칠수록 예술의 도시 파리에 대한 동경이 커졌다. 마침내 파리 아카데미(연구원)의 초청장을 받았고 다니던 예고에 사표를 냈다. 어린 남매를 둔 아내에게는 청천벽력이었지만 그도 절실했다. 1967년 7월 파리로 들어가 이듬해까지 있던 중 아내의 유방암 소식에 부리나케 귀국했다. 아픈 이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너무 멀리 갈 면목이 없어 아쉬운 대로 일본에 머무르며 작업했다. 새옹지마로 일본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이자 전위적 행위예술인 '해프닝' 등 실험적 예술을 추구한 구타이(具體)파와 교류하면서 작업과정과 행위가 갖는 자신의 독자성을 확고히 했다. 다시 파리로 간 것은 병마에 아내를 잃은 뒤였다. 1975년부터 1992년까지는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현대미술을 다채롭게 접한 그 시절은 자기발견의 시간이었다. 형태가 정제되고 색채가 정리되자 '백색(白色) 사랑'으로 이어졌다.
"서양인들은 유채색이 있어야 상대적으로 백색의 존재를 알지만 우리는 백색 그 자체를 아는 민족입니다. 흰옷을 입고 살았던 백의민족의 자연스러움이죠. 청(靑) 속에 백이 있고 흑(黑) 속에 백이 있어요. 그런 백색은 내게 부담이 없었고 부담을 벗으니 내용성을 완전히 파고들 수 있었어요. 색이 제거되고 내용에만 집중하면 화면은 단순해집니다. 단순화해야 본질을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초연한 웃음은 거장의 여유다. 팔순 넘은 원로화가가 조수 한 명 쓰지 않는 것은 자존심이다. 작업실과 2층을 잇는 계단 가득 파랑과 진자주 약간, 검정 몇 통을 제외한 절반가량이 모두 흰색의 물감통을 쌓아둔 것은 숭고한 작업 의지다. 현재 베르사유궁에서 전시 중인 작가 이우환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 화가"로 정상화를 꼽을 만했다.
"단색화가 미술 한류라던데. 내 작품을 해외 미술관들이 사 가고 아트페어에서 다 팔았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단색화가) 1970년대에 발생한 건데 작품이 가진 내재적 이유가 시대와 상관없이 인정받았나 봅니다. 단색의 즉각성 때문이기도 한데 현대인이 받아들이기에 화려한 색보다 오히려 단색이 즉각적일 수 있거든요. 색을 쓰는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단순해질수록 본질의 내용이 더 뚜렷해집니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He is... |
현대성·독창성 세계가 인정… 원로 작품 완판 행진 ■재조명받는 단색화 |
/여주=글 사진 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