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한국을 이끄는 50인의 경영인] 배영호 코오롱 사장

'신뢰경영'으로 노사화합·상생 추구<br>끊임없는 대화로 직원과 가까이<br>매출 연평균 30%씩 성장 성과


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코오롱 그룹 내에서 대표적인 ‘장수 최고경영자(CEO)’로 꼽힌다. 1998년 코오롱유화와 코오롱제약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현재 코오롱 대표이사까지 올해로 만 10년째 CEO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배 사장이 최고경영자로서 장수하고 있는 비결은 뭘까. 노사 관계를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비유하는 배 사장은 CEO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뢰’를 강조한다. 그는 “치료를 위해서 환자는 의사처방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의사로서 신뢰를 얻기 위해 의사는 환자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원들과 항상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뢰가 구축된다”고 말한다. 배 사장은 비서실과 회의실, 집무실을 줄인데 이어 회의시간 단축, 사장 해외 출장시 영접 없애기, 현장 결재, 전화ㆍ이메일 보고 등을 통해 불필요한 절차를 줄여 직원들에게 좀 더 다가가며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1970년 코오롱 입사 이래, 40여 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코오롱에서 그가 맡았던 업무는 ‘위기와 정체’로 변화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태반이었다. 그 과정 속의 많은 일화에서 그의 신뢰를 토대로 한 경영철학이 발견된다. 배 사장은 CEO가 균형 감각을 발휘해야 할 세가지 덕목으로 ▦주주환원 ▦구성원에 대한 보상 ▦장기투자를 위한 유보를 꼽는다. 배 사장은 노사간 신뢰라는 바탕 위에서 세 가지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조직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칭을 얻어냈다. 1998년 경영을 맡은 코오롱제약은 당시 19억원 적자에 이직률 40%에 이르는 ‘대수술’이 필요한 중환자였다. 사업 정리설이 도는 회사에 부임하자마자 그는 293명의 전 임직원에게 100만원씩의 격려금을 지급하고는 “나를 믿고 따라 달라”고만 했다. 그는 정리해고 대신 사업구조조정을 택했다. 임직원들에게 신뢰와 자신감을 불어 넣으면서 회사는 영업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부채비율, 반품률, 현금회수 기간도 크게 줄었다. 팔려고 해도 임자가 나서지 않던 코오롱제약은 흑자기업으로 전환, 매출이 연평균 30%씩 성장하는 우량기업이 됐다. 대표이사직을 겸했던 코오롱유화(현 코오롱 기능소재부문)도 수익구조 개선과 지속적인 투자에 힘입어 재임 기간 동안 매출을 2배 이상 올리는 한편 높은 수익을 올리는 ‘알짜’ 회사로 성장시켰다. 거래처와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업 부문의 흑자전환 사례는 1981년 배 사장이 산자사업 부장을 맡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자소리를 듣는 코오롱 타이이어코드 사업부문의 흑자전환도 거래선과의 신뢰구축을 통해 일궈낸 성과. 5년간의 뉴욕지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산자사업 부장을 맡을 당시 산업자재 사업은 가동률이 40%를 밑돌았고, 주종인 타이어코드 납품의 70%를 국내의 특정 타이어업체에 의존하는 바람에 경영 기복이 심했었다. 이에 배 사장은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세계 최고의 타이어 회사인 미국 ‘굿이어’를 설득한 끝에 납품 허락을 받아내 거래선을 다양화 할 수 있었다. 배 사장은 또다른 국내 대표 타이어 업체에도 납품을 성사시켜 결국 타이어코드 사업은 1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매출 역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2007년 ‘노사상생동행선언’이후 강성노조였던 코오롱 구미공장이 노사화합과 상생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배 사장의 ‘신뢰’ 중심 경영철학이 바탕이 됐다. 그는 CEO가 남편이라면 노조위원장은 부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남편이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도 엉뚱한 곳에 있다가 왔다는 오해를 산다면 평소 부인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 “남편이 돈을 벌어오면 부인이 살림을 꾸리듯이 사장은 벌고 노조는 절약해야 한다. 그런데 부인은 시장에 가서 콩나물 값도 깎는데 남편이 팁이나 뿌리고 다니면 되겠는가. 사장이 노조위원장에게 경영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남편이 부인에게 직장 얘기를 하는 것과 같다.” 권위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신뢰 경영에 앞장서는 조타수 덕분에 새로운 노사문화로 각광받는 코오롱이 ‘한국의 듀폰’을 꿈꾸고 있다. 배영호 사장은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배영호 사장은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무한불성(無汗不成)'이라는 한자어를 항상 되새기며 생활하고 있다. 몸소 실천하며 땀을 흘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1962년 경북고에 이어 1970년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배 사장은 당시 한국나일론이었던 코오롱에 엔지니어로 입사해 뉴욕지사 근무를 거쳐 산업자재사업 본부장(1989년), 원사사업본부장(1993년) 등을 역임했다. 1998년에는 현 코오롱 기능소재부문인 코오롱유화와 코오롱제약의 대표이사를 겸임하면서 흑자전환과 성장기반 확보라는 경영성과를 거뒀다. 2006부터는 코오롱 대표이사 사장을 지내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2002년부터 환경재단 감사, 2005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위원과 건국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1944년 부산출생 ▦1970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1970년 코오롱 입사, 뉴욕지사 근무, 산자사업본부장, 원사사업본부장, 구미공장장 역임 ▦1998년 코오롱유화, 코오롱제약 대표이사 사장 ▦2006년~현재 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경영원칙 ▦신뢰 중심 경영 ▦균형감각 있는 CEO ▦노사 상생 및 화합 추구 구미공장장 시절 중고 자전거로 현장 순찰
'자전거 공장장' 별명 얻기도
1996년 배 사장이 코오롱 구미공장의 공장장을 맡게 됐을 때 구미공장은 노조원들의 공장장실 점거와 철야농성이 계속되는 등 노사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배 사장은 공장장을 맡으면서 생산안정을 위해 노사 신뢰를 바탕으로 상생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는 주주의 가치는 결국 노사의 상생 협력체제 구축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점거와 밤낮없이 이어지는 농성을 통해 신참 공장장 길들이기가 일상화 돼 있던 상황에서 배 사장은 넥타이를 풀고 양말 바람에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진을 치고 있는 노조원들 틈에 앉았다. "어차피 내 방에서 밤을 새울 작정이라면 터놓고 얘기나 하자". 신임 공장장의 제안에 노조원들은 밤샘 토론을 했고 그와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결국 마음을 열고 상생의 길을 도모한다. 이후 그가 공장장으로 있던 3년여 동안 구미공장은 단 한 차례 생산차질을 빚은 적이 없다. 공장장 시절 그는 중고 자전거 한대로 30만평이나 되는 현장 곳곳을 순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노조 사무실에 들러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는 일이 자주 이어졌고 이는 노조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끌어내 자연스럽게 상생협력 관계 구축으로 연결됐다. 이 때문에 그에게 '자전거 공장장'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배 사장은 코오롱 대표이사 부임을 하루 앞둔 2006년 1월1일 신문 속 사진 한 장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닉 라일리 GM대우 사장이 노조원들과 함께 '신년 노사 합동 해맞이 행사' 사진. 그는 후에 "외국인도 파업으로 유명한 옛 대우차 식구들과 저렇게 상생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취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사화합. 코오롱 노조는 배 사장의 이 같은 열성과 노력을 인정해 지난해 4월 국내 산업계에서 두 번째로 '항구적 무분규'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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