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3일] 상평통보

[오늘의 경제소사/1월23일] 상평통보 권홍우 편집위원 통화당국 제1의 목표는 무엇일까. 안정이다. 화폐가치와 물가안정에 똑 들어맞는 이름을 가진 돈이 있다. 상평통보. 말 그대로 ‘언제나 똑같은(常平) 가치로 널리 사용되는 보배(通寶)’란 의미가 담겨 있다. 조상들의 작명실력이 녹아 있는 상평통보의 제조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쌀이나 포목 같은 물품화폐에 의존하던 조선이 주화제작에 눈을 돌린 계기는 임진왜란. 전쟁통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 증가로 성장한 유통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명나라군이 사용한 은화의 편리함도 맛본 터였다. 광해군 시절부터 논의를 시작해 효종 3년(1651년) 일부 발행됐던 상평통보가 본격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조부터. 숙종 4년(1678년) 1월23일, 상평통보는 조선의 법화가 됐다. 삼국시대부터 돈이 사용되고 조선 초에는 종이돈인 저화(楮貨)가 선보인 적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유통된 돈은 상평통보가 처음이다. 주조량이 모자라 동전의 가치가 뛰는 전황(錢荒)이 발생하고 돈과 미곡의 계절적 수요를 악용하는 연 5~6배 고리대의 성행으로 한동안 제조가 중단되는 부작용 속에서도 상평통보는 조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유통이 활발해져 택리지ㆍ동국지리지ㆍ대동여지도 같은 지도제작이 활발해지고 주막과 5일장도 빠르게 퍼졌다. 실학사상과 맞물려 박제가처럼 ‘양반상업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자본주의의 싹이 조선후기에 자생적으로 발생했었다’는 분석이 나올 만큼 성장하던 조선의 시장경제는 영ㆍ정조 이후 세도가문의 발호 등 정치불안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외국 돈에 밀려난 우리 돈은 상평통보라는 고유명사 대신 자기비하의 뜻이 담긴 ‘엽전’으로 불렸다. 상평통보에 담긴 돈과 언어의 시간표에는 민족의 수난사가 베어 있다. 입력시간 : 2006/01/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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