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뒤로가는 식량안보/현의송 농협중앙회 조사부장(특별기고)

◎“쌀은 상품아닌 국가생존 자체” 인식 절실○밀려오는 외국농산물 지방에 출장갈 일이 있어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겨울 들녘을 바라 본 적이 있다. 어떤 곳에는 비닐하우스가 대규모로 설치돼 있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넉넉해졌고 어떤 곳에는 보리인지 밀인지 파릇한 새싹이 자라고 있어 흐뭇했다. 그러나 그 넉넉함과 흐뭇함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텔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바로 곁에 또 다른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 건물들은 모두 논을 메워 지어진 것이었고, 또 지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야금야금 농경지를 잠식해가고 있으니 해마다 벼 재배 면적이 줄어드는 것이겠거니…」하는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올해 사상 유례없는 풍작을 이루었다지만 겨우 쌀만 자급하는 실정이고 전체 식량으로는 하루 세끼 가운데 두끼를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는 식량문제에 관한 한 태평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는 『농민들의 쌀수매값 인상 요구는 「소비자의 주권」을 무시하는 집단이기주의다』는 주장이 나와 어처구니가 없었거니와 여기에 한술 더 떠 『최근 농업부문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으나 그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세상에서 식량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거나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식량의 중요성이다. 아무리 호화주택에 살고 고급 자동차를 굴리며 많은 돈을 지녔더라도 정작 먹을거리가 없으면 정상적인 인격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래서 「배가 차야 예절도 안다」는 속담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농업이 바로 이러한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산업임에도 우리나라의 농업 현실을 들여다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싼게 비지떡」 아니다 돈벌이가 안되고 일도 힘들다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농촌을 떠나고 있고, 농산물시장마저 개방돼 외국의 값싼 농산물이 마구 밀려들어오고 있다. 여기에 국민의식까지 농업을 점차 뒷전으로 내몰고 있다. 효과가 없는(적은) 국내 농업을 부양시키기보다는 싼값에 농산물을 사먹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농업은 과연 포기해도 괜찮은 산업일까. 농업(임업 포함)은 국가산업적 측면에서 볼 때 지난 95년말 현재 전체 취업자의 11.9%, 국내총생산(GDP)의 6.5%를 차지하며 농자재 및 농기계산업, 식품가공산업, 유통, 운송업 등 전후방 관련산업의 유발효과가 매우 큰 산업이다. 이는 국가경제의 내실있는 발전에 농업이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은 이러한 경제적 효과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성하기까지 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이라는 점이다. ○자급유지 최선 다해야 물론 식량을 외국에서 사다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식량(특히 쌀)을 우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싼값으로 수입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중대한 오판이다. 지금 세계인구 57억명 가운데 8억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 불행히도 기아인구는 해마다 늘고 있고 세계유수의 기상학자와 농업연구가들은 인구증가와 지구차원의 대규모 기상이변, 사막화 등으로 머지 않은 장래에 식량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간단한 가정을 해보자. 이 땅에서 벼농사가 사라져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 먹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쌀을 수출하던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수출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우리는 당당하게 「소비자의 주권」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때 식량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위협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북한동포가 있다. 통일이 되면 쌀 수요는 급증할 것이고 그러면 쌀은 무기로서의 위력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량안보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나라의 쌀값이 국제시장에 비해 비싸고,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농업 자체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농업부문 투·융자사업은 주로 토지기반 정비와 유통시설 확충 등 농업 인프라 구축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바 이는 도시부문의 사회간접시설과 성격이 같아서 그 효과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스로 이루어낸 쌀 자급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우리 쌀이 국제경쟁력을 지닐 수 있도록 생산비를 낮추고 미질을 향상시키려는 생산자들의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바로 우리 농업에 대한 바른 이해와 농업을 수호하려는 국민적 합의일 것이다. 식량에 있어 진정한 소비자의 주권이란 안전한 식량을 원하는 때에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안정적이고 건전하게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다. 식량생산이라는 농업의 본질적인 기능에 덧붙여 농촌이 갖는 지역사회 유지, 자연환경 보전, 전통문화 계승, 청소년 교육기회 제공 등 다양한 기능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농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지키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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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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