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김정일은 누구인가, 우상화… 부자 세습… 통치권 강화에 매달렸던 69년의 삶

출생 시점 불분명… 7세 때 친모 잃고 계모 밑에서<br>60년 김일성大 들어간 뒤 후계자 공부 열 올려<br>73년 노동당 조직·선전 비서 된 뒤 軍 영향력 확대<br>김일성 사후 98년 국방위원장 올라 최고통치권자로


사망 사실이 사흘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태어난 시점도 불분명하다. 김 위원장의 일생은 그 자체가 북한 체제의 통치권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그는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인 3남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모두 우상화의 과정에 이용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시에 몰두=김 위원장의 출생 시점은 두 가지 설이 등장한다. 북한은 그가 1942년 2월16일 백두산 근처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밝힌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하고 특히 매 5주년ㆍ10주년에 대규모 경축행사를 여는데 두 지도자의 꺾어지는 해를 맞추려고 김 위원장의 출생연도를 김일성의 12년에 맞춰 1942년으로 늦췄다고 반박한다. 우리나라 정부 당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중국ㆍ러시아에는 김 위원장이 러시아 극동지역인 하바로프스크에서 북동쪽으로 68㎞ 떨어진 작은 마을 바츠코예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이라는 러시아식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쌍둥이 동생 '김슈라'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지난 1945년 8ㆍ15 이후 부모와 함께 귀국한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일곱 살 때 어머니 김정숙이 세상을 떠나면서 계모 김성애 밑에서 불우하게 자란다. 친어머니인 김정숙에 대해 김정일은 후계자가 되자 '항일의 여성 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애정을 보였다. 그는 또 어머니의 출생지를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며 우상화를 꾀했다. 김 위원장은 1948년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평양남산소학교에 입학한다. 이 시절 그는 '김일정 장군님의 전략연구소조'를 조직하기도 했다. ◇후계자 공부에 몰두한 청년 시절=김 위원장은 제1중학교와 고급반을 거쳐 1960년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 기간에 권력 후계를 위해 실력을 다지는 데 전념했다. 혁명 전적지를 답사하거나 노동당 회의에서 한 간부에게 사대주의에 물들었다고 꾸짖기도 했다. 그는 1961년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경쟁에 진입했다. 1964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선전선동부, 조직담당 비서로 발탁돼 김일성 체제의 손발로 일했다. 그는 이 기간 천리마운동의 효율성을 높이거나 가극 '피바다' 등 예술을 통한 선전에 힘썼다. 특히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김 위원장은 김일성의 신뢰를 확보했다. 이 시점부터 그는 계모 김성애는 물론 이복형제 김평일과 그의 후견인인 삼촌 김영주의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들을 제거하고 1974년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노동당 장악 후 군부까지 손 뻗쳐=1970년대 이후 김 위원장은 권력승계를 위해 북한의 지휘체제와 사상을 수정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이것이 자신에 대한 우상화로 이어지도록 했다. 다만 김 위원장은 노동당에서 기반을 다진 탓에 상대적으로 군의 지지가 부실했다. 이에 그는 군 인사권을 당 조직지도부로 옮겨 통제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후계자인 아들 김정은에 대한 북한 군부의 신임이 불분명한 것은 결국 김 위원장의 군부 장악이 일부 실패했다는 방증이라는 게 중론이다. ◇권력승계 이후 개방 꾀했지만=1994년 7월8일 아버지 김일성의 사망 이후 그는 유훈통치를 발표했고 김일성을 영구주석으로 추대했다. 죽은 김일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것이다. 실제 얼마 안 가 그는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이미 자신이 장악한 최고인민위원회에서 맡게 했다.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선출되고 1998년 9월 국방위원장에 취임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 통치권자가 됐다. 그는 북한의 통치권자로서 본격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하며 개방을 도모했다. 그가 취임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경제상황은 극심하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아울러 1990년 독일의 베를린장벽 붕괴와 구소련의 와해를 목격하며 '달러 확보'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해석이다. 그는 나진ㆍ선봉의 무역지구를 확대하고 개성시내 개성공단과 함경남도 원산에 무역항을 재정비해 해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특구를 모방한 4개 특구를 만들기도 했다. 남북관계 역시 경제를 지렛대 삼아 정치 영역까지 대화를 확대했다. 1998년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후 개성공단이 열렸고 금강산 관광도 실시하는 등 남북 경제협력을 시작했다. 특히 2000년 그는 52년 만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고 이 자리에서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 반란…불투명한 3세 승계=김 위원장 스스로는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가 악화하면서 그의 통치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3남 김정은이 김 위원장 사망 이후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그의 건강 이상설은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끊임없이 등장했으며 그 스스로 침착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였다.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지만 군 내부는 물론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도 20대 후반에 경험이 없는 김정은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직후 미국과 중국은 북한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북한 관련 정보를 주고받은 정황이 워키리크스 외교 전문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결국 2011년 12월17일 뇌졸중 후유증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불안한 북한의 내부상황으로 북한 당국은 죽은 지 사흘 만에야 그의 사망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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