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특파원 칼럼] 펀더멘털이 최후 보루

최형욱 뉴욕특파원 choihuk@sed.co.kr


1998년 11월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당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트리플 A(Aaa)'에서 '더블 A1(Aa1)'으로 강등했다. 성난 일본은 미 정부의 손아귀에 있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3대 신용평가사를 못 믿겠다며 자국 신용평가사를 키우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R&I·JCR 등 일본 신용평가사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신용평가사인 다공도 지난해 10월 미국 신용등급은 기존의 A에서 A-로 하향조정하면서 자국은 최고등급인 AAA를 유지해 비웃음만 사고 있다.


반면 S&P 등 국제신용평가사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신용등급을 줄줄이 강등해 위기를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막강하다. 또 2008년 이전 고객사인 월가 대형은행들을 위해 신용부도스와프(CDS)·부채담보부증권(CDO) 등 쓰레기 상품에 최고등급을 매겼다가 금융시장 붕괴의 단초를 마련했음에도 아직도 일부 신흥국에는 저승사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는 미·영 자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냉혹한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자국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며 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 등 일부 신흥국의 금융위기 조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을 가속화할 기세다.

신흥국 위기를 질적 고도화 기회로


리처드 피셔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 등 연준 인사들은 "연준은 세계의 중앙은행이 아닌 미국의 중앙은행"이라며 '마이 웨이'를 외치고 있다. 라구람 라잔 인도중앙은행(RBI) 총재 등 신흥국이 아무리 국제공조 복원이나 연준의 책임 의식을 강조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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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흥국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과거 연준이 경기침체를 극복한답시고 헬리콥터로 무차별적으로 돈을 뿌리는 바람에 신흥국은 몰려드는 투기자금 탓에 부동산 등 자산버블·물가상승·통화가치 급등에 따른 수출경쟁력 하락 등에 시달려왔다. 이번에는 거꾸로 테이퍼링에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금융위기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지난달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산실'이라며 외면해오던 다보스포럼을 급하게 찾아 외국인 투자를 호소할 정도다.

하지만 연준의 무책임만 탓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러시아·브라질 등은 과거 밀려드는 외국인 자본을 소비에만 쓰는 바람에 원자재 수출형 경제를 환골탈태시키는 데 실패했다. 인도네시아·인도·태국 등도 선거를 앞둔 포퓰리즘 정책과 고질적인 정정 불안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반면 값싼 외국인 자금을 펀더멘털 개선, 경제구조 업그레이드에 활용한 멕시코·폴란드 등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인도 등 일부 신흥국 위기는 상당 부분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는 얘기다. 최근 이들 국가들의 경우 외환시장 개입, 기준금리 인상 등에 힘입어 금융불안이 약간 소강 국면에 접어든 상태다. 하지만 정부의 기초체력 강화 노력은 뒷전인 채 중앙은행의 미봉책으로만 일관해 더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높다. 기준금리 인상 등 연준의 본격적인 출구전략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자본의 대이동과 맞물려 구조개혁을 앞둔 중국·일본 리스크도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중국의 경우 투자·수출 위주에서 내수 중심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했지만 부실덩어리인 금융 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해 언제든지 폭탄이 터질 수 있는 상황이다.

냉혹함 둘러싸인 글로벌 금융시장

특히 일본은 그동안 돈 풀기로 경기를 부양해왔지만 이번 신흥국 위기로 엔화 가치가 강세로 돌아설 경우 구조개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베노믹스가 좌초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일본 국채금리 급등에 따른 신용경색, 한국 내 일본자금의 유출 등을 불러 우리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국 금융불안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구조개혁과 펀더멘털 개선뿐이라는 뜻이다. 우리 정부도 위기 전염 가능성 모니터링, 시장불안 선제 방어 등의 단기 대책도 좋지만 사태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궁극적으로 경제 구조의 취약점 보강과 기초 체질강화에 주력해야 한다. '축복된 재앙'으로 불리는 1998년 외환위기 때처럼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장기 밑그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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