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1년 뒤인 2010년. 다국적제약사 H사의 특허담당 책임자인 최현식 과장은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국내 제약사가 자사의 고혈압치료제와 주성분이 동일한 복제약 허가를 신청해왔다는 연락이었다. 최 과장은 즉각 내부회의를 소집하고 며칠 뒤 특허법원에 복제약이 자사제품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국내사의 복제약 허가절차는 즉시 중단됐고 소송은 1년이 넘도록 공방을 거듭했으며 결국 국내사는 심혈을 기울였던 복제약 출시를 포기했다. 정당 1만원이 넘는 고가의 H사 제품만을 먹고 있던 고혈압환자인 최창락(65)씨는 “효능이 똑같고 값이 싼 복제약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실망이 크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반면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를 먹는 김종식(67)씨는 완제의약품 관세철폐로 이전보다 약값이 싸져 ‘용돈을 아끼게 됐다’며 싱글벙글했다. #2. 이날 오후 여의도 국회의 정기 국정감사장에서는 보건복지부의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노동당의 한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한미 FTA 이후 다국적제약사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60%로 집계돼 3년새 2배 가까이 늘었다”며 “국내 중소 제약사가 하루걸러 하나씩 수익성 악화로 부도위기를 맡고 있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한편 이날 저녁 TV뉴스에서는 앵커가 국내 2, 3위 제약사인 K사와 J사가 전격 합병을 선언해 1조5,000억원 규모의 대형 제약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국내 제약업계가 한미 FTA 쓰나미로 충격에 빠졌다. 물론 앞의 가상 시나리오가 얼마나 들어맞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제약업계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제약업계는 지난 9일과 13일 정부와 국회 관계자들을 잇달아 만나 어려움을 호소했다. 9일 제약협회와 제약사 대표들은 복지부 차관, 한미FTA국장 및 팀장 등 복지부 관계자와 간담회를 가졌으나 회의를 마치고 나온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문경태 제약협회 부회장은 “정부가 보따리(제약업계 육성책)는 내놓지 않고 ‘FTA 협상에서 제약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입장만 되풀이한 채 제약업계 달래기에만 급급하다”며 “피해정도를 느끼는 체감온도가 서로 너무 다르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협회는 13일 한나라당 FTA피해조사특별위원회와 간담회를 갖고 ‘한미 FTA 협상에 따른 제약업계 건의서’를 전달했다. ◇향후 5년간 2조원대 매출감소 예상=정부와 업계는 제약 분야가 어려워진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줄지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다. 제약협회는 비공개로 진행된 한나라당 특위와의 간담회에서 한미 FTA로 인한 국내 제약업계 5년 피해액이 1조1,000억~2조2,0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연 피해액이 2,200억~4,4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시민단체가 추정한 연 1조원보다는 적지만 정부가 추정한 연 피해액 1,000억원의 4배에 이르는 수치다. 이처럼 정부와 업계가 추정한 피해액이 큰 차이를 보이자 한나라당 피해특위는 제약협회에 복지부와 공동으로 피해액을 산출, 이로 인한 혼란을 막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로 복제약 출시 지연=제약업계는 우선 ‘의약품 허가와 특허 연계’를 가장 큰 타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오리지널의약품과 성분이 동일한 복제약을 허가신청시 오리지널약을 시판하는 제약사가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할 경우 기존과 달리 복제약 허가과정이 정지돼 그만큼 출시가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특허소송을 할 경우 자동적으로 허가가 30개월간 지연되게 돼 있다. 제약업계는 소송남발로 복제약 출시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허가ㆍ특허 연계로 인한 허가지연을 최대 10개월을 초과하면 안된다는 조항을 법으로 명시하자고 협회는 주장하고 있다. 문 부회장은 “호주의 경우 특허침해 여부만 검토할 뿐 허가과정은 그대로 진행된다”며 “특허와 허가연계는 절대 안된다고 정부에 수차례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협상 앞둔 시점 약제비 적정화 방안 발표 왜?=제약협회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가 협상을 앞둔 시점에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발표해 이를 고수하려다 너무 많은 것을 내줬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즉 비용대비 효과가 있는 약만 보험리스트에 올린다는 ‘포지티브 리스트’를 골자로 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협상 내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사실 제약업계는 올해부터 시행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FTA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부담으로 여기고 있다. 제약업계가 최근 한나라당 FTA피해특위 간담회에서 포지티브 리스트 3년 유예를 주장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한편 종근당의 한 관계자는 “FTA 이후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퇴출될 것”이라며 ‘제약업계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장우순 제약협회 홍보팀장은 “생존을 위해 제약사들이 전문화할 것으로 본다”며 “생산 또는 연구개발 분야에 집중하거나 특정질환 치료제를 집중으로 키워 특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신약개발 ‘성공불융자制’ 도입 R&D리스크 정부도 분담을”
특별법 제정 5,000억 기금 조성…연구개발비 稅감면 확대도 건의 제약업계는 '제약산업육성법' 또는 '제약산업발전기금법' 제정을 통한 체계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제약협회는 특별법을 통해 매년 500억원씩 10년간 5,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업계는 신약개발 능력 향상을 위해 우선 '성공불융자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성공불융자 제도란 정부가 신약개발자금을 일정 부분 지원하고 개발에 성공했을 경우 국가에 되갚는 것으로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문경태 제약협회 부회장은 "신약개발은 수천번 시추 후 한 방울의 기름을 얻는 것처럼 성공확률이 낮은 고위험산업"이라며 "성공불융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연구개발에 대한 리스크를 일정 부분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제약사가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비용에 대해 세금감면 혜택을 늘려줄 것도 건의했다. 현행 규정은 지난 4년간 발생한 연구개발비의 연평균 금액 초과분에 대해서만 소득세ㆍ법인세 등을 감면해주고 있으나 초과할 경우 연구개발비 전액에 대해 감면혜택을 달라는 것이다. 아울러 제약업계는 포지티브 리스트 실시 3년 유예를 주장하며 특허만료 오리지널의약품 가격인하에 맞춰 복제약의 가격을 동시에 내리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신약개발 능력이 있는 제약사를 집중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이 집계한 국내 주요 제약사의 연구개발투자현황에 따르면 진행 중인 신약개발에 필요한 연 투자금액은 8,600억원 규모다. 신약조합은 이중 제약사가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은 약 3,000억원선으로 연간 5,600억원 규모의 부족분을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신약개발 제약기업에 세제혜택 및 약가우대 정책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강추 신약조합 회장은 "다국적 제약사들은 연평균 200여건의 신약후보물질에 대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나 매출액 대비 수익구조가 취약한 현실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신약개발은 한계가 있다"며 "혁신적 신약개발 능력을 갖춘 제약사들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제도적 지원이 최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재천 신약조합 이사는 "보건의료사업 분야에 포함돼 있는 신약개발지원자금을 별도로 분리 책정해 혁신적 신약개발 능력이 있는 제약사에 우선 지원해야 한다"며 "신약개발을 위한 시드머니(종자돈) 확보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우선 보건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식약청 등 관련 공무원, 제약협회, 신약개발연구조합 등 관련단체 및 제약업체(4~5개) 대표, 전문가가 포함된 제약산업 발전협의회를 이달 말까지 구성하고 제약산업 육성방안 등에 대한 의견수렴에 나선다. 제1차 '제약산업 발전협의회'는 이달 말 열릴 예정이다. 상위 제약사의 한 임원은 "자유무역협정(FTA)이 3~5년 후 발효가 예상되는 만큼 아직 시간은 있다"며 "연구개발 부문을 강화하고 특화된 개량신약 개발능력과 해외수출기반 확대 등 업계 스스로의 체질개선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