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14일] 메이지(明治)유신


‘미증유의 변혁을 이루고자 하니…(중략)…모두 협심 노력할지어다.’ 1868년 3월14일(양력 4월6일), 소년 티를 막 벗은 16세의 일왕 무스히토(睦仁)가 발표한 ‘5개조 서문’의 끝부분이다. 메이지유신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본을 264년간 지배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누리고 왕권을 되찾은 무스히토의 권력배경은 서부지역인 사쓰마번와 조슈번의 개혁을 주도한 하급무사 출신 청년개혁가그룹. 무스히토는 먼저 권력기반 강화와 서구문물 수용에 나섰다. 수도 에도(江戶)의 이름을 도쿄로 바꾸고 전국을 순행한 것도 일본의 권력자가 쇼군에서 국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한 시위였다. 무스히토를 구심점으로 한 개혁그룹은 인재를 뽑아 세계 12개국에 내보내고 각국의 특장점만 따내 일본에 심었다. 미국에서는 기업경영을, 영국에서는 교통 시스템과 해군을 배웠다. 프랑스를 본받으려던 육군은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독일식을 따르고 법률은 프랑스를 모방하는 식으로 일본은 빠르게 커나갔다. 생전에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겠다던 포부를 지녔던 개혁그룹은 목표를 훨씬 초과했다. 메이지유신 50년이 지난 1차 대전 직후 일본은 세계 5대 강국 중 하나로 인정 받았다. 개혁그룹은 오늘날 유신 지사(志士)로 불리며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유사상 전례 없는 공업화 성공사례로 꼽히는 메이지유신에는 처절한 개혁의지가 깔려 있다. 언제든지 자결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치고 그들은 세계를 교실로 삼았다. 어쩌다 구설수에 휘말리면 명예를 지킨다며 배를 갈랐다. 유신 지사 중에는 병역기피나 재산증식으로 구설수에 오른 자가 없다. 메이지유신에서 정말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명감과 명예의식,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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