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4월 8일] 천안함과 9·11

천안함과 미국 9ㆍ11 사태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파괴라는 본질이 그렇고 국난이라는 성격이 그렇다. 천안함과 9ㆍ11 사태를 동시에 비교하기에는 부담이 없지 않다. 천안함 침몰 원인이 9ㆍ11 사태처럼 테러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둘을 동시에 얘기하는 이유가 있다. 떠올려보자. 9ㆍ11 사태를 당한 미국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위기를 맞은 미국이 보인 행동 가운데 언뜻 이해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납치된 여객기 속에 갇혔다 희생된 승객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쌍둥이 빌딩 속에서 죽어간 희생자들을 끝까지 밝혀내려 노력하고 각종 지원을 다했으나 여객기 승객들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했다. 비겁한 자는 추모하지 않는 美 왜 그랬을까. 이유가 지극히 미국적이다. 총도 아니고 칼로 무장한 납치범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기에 추도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비겁함'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미국인들답다. 미국적 사고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중요한 것은 그 효과다. 9ㆍ11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항공기 납치 미수 사건이 생각난다. 승객들이 적극적으로 범인들과 격투를 벌여 납치를 방지한 영웅담은 9ㆍ11 사건과 반성의 결과다. 국난이 나라와 시민사회를 보다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데에는 '비겁함'에 대한 거부가 깔려 있다. 시야를 한국으로 돌리면 갑갑해진다. 사건 발생 13일이 지나도록 오리무중이다. 가면 갈수록 정부와 군의 거짓말이 드러난다. 청와대와 군의 시각 차이도 엿보인다. 합참과 각군의 늑장 보고와 뒤늦은 대응, 엇박자의 이유를 물으면 답은 대개 두 가지로 돌아온다.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또 다른 의혹을 낳거나 군사기밀이어서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군사기밀인가. 미국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다. 대통령 말씀대로 국제사회가 우리의 천안함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통로 중 하나인 생존자들의 격리 수용부터 푸는 게 순서다. 생존자 격리 자체가 국제사회의 비웃음거리다. 단추 하나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모조리 어긋나기 마련이다. 정부와 군의 발표가 의혹을 증폭시키는 이유가 의도된 거짓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적 기준, 즉 비겁함은 희생자라도 추모 대상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으로는 무엇인가 비겁해 보인다. 국가안보회의 참석자 대다수가 군 면제자라는 점도 그렇거니와 수많은 실종자와 희생자가 있음에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는 현실은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미국과는 딴판이다. 난국을 푸는 방법은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세에 있다. '속도보다 정확성이 우선'이라는 대통령의 말씀은 백 번 옳다. 그러나 정확성이 지연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정부와 군 스스로 의혹의 열쇠들을 풀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생존자 증언뿐 아니라 인양 선체의 절단면 공개 여부도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진상규명 지연에 동의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불편한 진실도 과감히 공개를 일각에서는 미국의 경우 9ㆍ11 테러 진상 규명에 3년이 걸렸다고 강조하며 언론의 추측성 과잉 보도와 우리 국민의 조급증을 탓한다. 그럴싸하지만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미국은 대부분의 정보가 공개되는 가운데 3년이 걸렸다. 심지어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9ㆍ11의 자작극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3년 세월 동안 뒤지고 또 뒤져 진상을 발표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원인 규명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에서 대통령까지 제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정보 공개를 하면서 정확히 밝혀낼 필요가 있다. 치열한 진상 규명으로 비겁함과 책임회피 같은 약점을 극복하는 길은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남겨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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