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외환관리] KIC, 사냥꾼의 출발점 될까
외환운용 패러다임을 바꾼다걸음마수준 운용체계 현실 탈피 첫 실험대자산규모 작고 국공채 등 투자대상도 한정"재경부로부터 독립성확보가 무엇보다 중요"
[기로에 선 외환관리] GIC의 성공 비결
지난 2004년 12월28일. 서울 강남의 신흥 ‘랜드마크’로 불리는 스타타워에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이 발을 디뎠다. 주인공은 싱가포르투자청(GIC). 그들은 9,000억원을 쏟아부어 서울 심장부를 사들였다. “서울 부동산값이 폭락하면 어쩔 것이냐” 따위의 지적이 싱가포르 내에서 나왔다는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국제 자산시장의 훌륭한 사냥꾼 역할을 수행하는 GIC에 격려를 보냈을 뿐.
지난 5년 동안 GIC가 한국 부동산에 투자한 규모는 1조4,000억원을 넘는다. 외환보유액이래야 우리의 절반이 조금 넘는 1,120억달러(2004년 말 기준)에 불과한 싱가포르지만 보유액의 일부를 떼고 키운 자산으로 이렇게 한국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같은 시각 과천 정부종합청사. 재정경제부 당국자들은 이틀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판 GIC’를 꿈꾸며 야심차게 기획했던 한국투자공사(KIC) 법안이 야당의 반발로 다음해 임시국회로 넘어간 것. 한 당국자는 “우리는 언제까지 ‘먹잇감’에 머물러야 하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외환보유액 2,000억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4대 외환강국으로 발돋움했음에도 여전히 미국과 중국ㆍ일본 등에 끼여 ‘넛크래커’ 신세인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8월 이런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실험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 KIC를 돌파구로 활용하겠다는 포부가 대단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30억달러의 외화빈국(貧國)에서 외환대국으로 번듯하게 성장했건만 보유달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넘치는 외국 돈이 오히려 독이 되는 초라한 부자 신세”라고 개탄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한 보고서는 그가 전한 현실을 방증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적정 외환보유고 이상으로 갖고 있다고 평가된 외화물량은 지난해 평균 580억달러. 연구원은 이로 인해 국내 민간투자수익률(연 6%)과 미국 국채금리(연 4.5%)의 차이에 해당하는 23억7,800만달러(2조7,00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분석했다. 달러를 사들이느라 쓴 돈을 다른 곳에 투자했다면 수십억원의 돈을 더 벌 수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해 5조원에 달한 통안채ㆍ환시채 이자를 합치면 ‘곳간비용’으로 쓴 돈만 1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약(弱)달러가 장기화할 경우 닥쳐올 미래는 더 암울하다. 수출로 먹고 사는 ‘원죄’ 때문에 한국은 환율방어를 포기할 수 없는 형편이다. 더 많은 달러를 사줘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달러는 투자할 곳이 없어 쥐꼬리 이자를 주는 미 재무부채권을 사는 데 급급하다.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달러 값을 떠받치는데 쓰고 미국의 쌍둥이 적자나 메워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뭔가 큰 변화의 그림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유외환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박대근 한양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적정수준인 1,500~1,600달러를 넘어선 달러는 ‘보유고’가 아니라 ‘외화자산’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식의 변화는 주변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스티븐 젠 모건스탠리 수석애널리스트는 “전세계 달러의 6할을 사주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외환보유고를 유동성 축적 수단이라기보다는 운용 중인 펀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오죽하면 ‘한국은행(BOK) 쇼크’의 여진이 꺼지기도 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통화 다변화’라는 발언을 꺼냈을까.
그렇다면 KIC는 우리 외환운용체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뺑? 싱가포르는 81년부터 GIC를 운영하며 외환보유의 부담을 상당 부분 덜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GIC가 굴리는 자산이 1,400억달러 이상이며 평균 수익률만 연 8%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KIC의 설립의미는 보유외환의 수익률 제고에 그치지 않는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단순히 몇%의 수익을 더 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며 “KIC를 통해 넘치는 외환을 달러표시 자산 이외에서 굴리는 법을 배우고 역외 자산운용시장을 개척해나가는 것이 진짜 목적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환율이 떨어지면 넋 놓고 하늘만 쳐다봐야 하는 수동적인 입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해외 유수의 자산운용사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선진繡珝?자산운용의 노하우를 배우고 외환운용체계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 같은 목표가 실현될 때 국제 금융시장에서 ‘먹잇감’에 불과했던 한국은 어엿한 ‘사냥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200억달러에 불과한 운용규모와 국공채 등으로 한정된 투자대상은 사냥꾼 노릇을 하기에는 버겁다. “산티아고 노인(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이 낚았던 살점이 다 떼내진 고기”(이헌재 전 부총리)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민간마인드를 갖춰야 할 KIC가 재경부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은 외환팀의 ‘재경부 출장소’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공룡 GIC’도 탄생 당시 가진 돈은 75억달러였다. 최중경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은 “외환보유액이 더 늘고 국민연금이 참가하면 오는 2012년께는 1,000억달러까지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자산운용능력이 검증되면 투자대상도 다변화될 수 있다. 새로운 외환운용체계의 실험대로 출발할 KIC가 ‘골리앗’으로 성장할 수만 있다면 한국의 환주권 회복도 그리 요원한 일만은 아닌 셈이다.
/특별취재팀=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김민열 기자 mykim@sed.co.kr
현상경 기자 hsk@sed.co.kr
입력시간 : 2005-03-1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