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25> 피아니스트 조성진 열풍이 남다른 이유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 2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언론은 조 씨의 쾌거를 대서특필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앞으로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우리 문화와 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축전을 보냈다. 조성진의 수상 소식은 음악인 부모 밑에서 자라지 않았고, 유명한 한국계 예술인들처럼 극성 부모의 지원을 받지 않은 젊은 음악인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한국인이 쇼팽 콩쿠르를 수상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로 큰 경사다. 조 씨 자신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기억될 것임은 물론이다.

물론 질시의 시선도 있었다. 일본의 여류 피아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 아오야기는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상을 받은 것이 ‘병역특례’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렸다가 사과했다. 으레 유럽인이 타는 상을 아시아인이 받았으니 당황했을 만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에겐 조성진의 콩쿠르 우승은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은 국가 차원의 영광이라는 점이다. 폴란드의 권위있는 피아니스트이자 콩쿠르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istian Zimmerman)조차 조 씨의 음악적 해석과 테크닉에 찬사를 보내지 않았는가.

한 누리꾼이 ‘예원학교의 조촐한 플래카드’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사진. 그러나 학교 측에 확인한 결과 주문한 축하 현수막이 나오기 전  잠시 붙여놓은 것이었다. ‘조성진 홀대’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BR><BR><span class=''><div style='text-align: center;max-width: 336px;margin: 0 auto;'><div id='div-gpt-ad-1566459419837-0'><script>googletag.cmd.push(function() { googletag.display('div-gpt-ad-1566459419837-0'); });</script></div></div></span><br>한 누리꾼이 ‘예원학교의 조촐한 플래카드’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사진. 그러나 학교 측에 확인한 결과 주문한 축하 현수막이 나오기 전 잠시 붙여놓은 것이었다. ‘조성진 홀대’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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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조성진 축하’를 둘러싼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조 씨의 모교인 예원학교 측에서 기사 인쇄물에 빨간 펜으로 축하 벽보를 붙인데 대해 일부 재학생들이 온라인에 불만의 글을 올리면서 벌어진 소동이다. 한 재학생은 ‘예원학교의 조촐한 축하메시지’란 제목으로 학교 측을 비꼬았고, 심지어 “왜 학교가 이렇게밖에 동문을 예우하지 못하냐”며 울분을 터뜨리는 글까지 나왔다. ‘음악계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수상 소식에 비해 성의 없어 보이는 대우 아니냐며 일종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확인해본 결과 일부 학생들의 분노는 완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원 측은 주문된 축하 현수막이 도착하기 전 임시로 벽보를 붙여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모교로서 조성진의 쾌거를 조금이라도 빨리 축하하고 싶은 마음에서 벽보라도 서둘러 붙인 행동이었던 셈이다. 칭찬을 받을망정 ‘홀대’라는 비난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지도 않고 분노부터 드러낸 일부 학생들의 처신은 분명 경솔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찬밥 대우를 받았길래 그랬겠냐는 부분은 한 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계가 특히 클래식 분야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해프닝이다. 실제로 우리 문화 행정의 주무 기관인 문화예술위원회나 콘텐츠진흥원에는 클래식 음악 예산은 참으로 박하다. 한 오케스트라는 음반 제작 사업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국악, 크로스오버, 가요만 지원되고 클래식은 안 된다는 답변을 들은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음악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될 말인가. 기가 막히다.

그런데 정부는 예산 지원을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 분야가 지원을 받고도 좀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항변이다. 대체 ‘성과’란게 뭔가? 성과에는 숫자로 표현되는 정량적 평가 결과도 있겠지만 개인의 수월성이나 질적 탁월성으로 표현되는 정성적 평가 결과도 있다. 정부가 무슨 잣대로 성과 운운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부모를 뒀느냐, 어느 나라에서 공부했나, 어떤 선생님을 뒀느냐에 따라 지원의 수준을 재단해오던 문화예술계의 후진적 행태에도 문제가 있다. 쇼팽 콩쿠르 우승을 한 조성진이 어디 혈통이나 금전적 뒷받침으로 그 같은 쾌거를 이뤘나? ‘금수저’ 없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성공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밀어줄 사람을 제대로 못 밀어주는 대한민국 풍토에 대한 엄중한 일갈임을 정부와 예술계 기득권층는 깨달아야 한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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