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신의 잔혹한 눈물?! 다이아몬드



560억원. 지난해말 경매에서 캐럿당 최고가로 팔린 다이아몬드 ‘블루문’의 낙찰가격이다. 크기는 12.03 캐럿. 역사상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는 비텔스바흐.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2억 3,400만 달러에 팔렸다. 크기 35.56캐럿. 그렇다면 530.4 캐럿 짜리 다이아몬드는 얼마를 받아야 할까.

가격을 추정하기 어렵다. 워낙 크거니와 소유주인 영국 왕실이 내놓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견줄만한 다른 보석이 많지도 않은 이 보석의 이름은 ‘아프리카의 위대한 별’. ‘컬리넌 Ⅰ’로도 불린다. 컬리넌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이아몬드는 이 뿐 아니다. Ⅰ(1)부터 시작해 Ⅸ(9)까지 있다. 두 번째로 큰 컬리넌Ⅱ는 317.4 캐럿, 세 번째인 컬리넌Ⅲ 94.4캐럿. 가장 작은 컬리넌Ⅸ는 4.4 캐럿이다.


컬리넌 시리즈의 원석은 이보다 훨씬 컸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가 1905년 1월 26일. 아프리카 남부 프리미어 광산에서 저녁 순찰을 돌던 광부 포웰의 발에 걸렸다. 보고를 받은 메니저 프레드릭 웰스는 바로 알아차렸다. 대박! 3,106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세상에 이렇게 알려졌다.

건축업자 출신의 광산주 컬리넌은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트랜스발 식민정부에 넘겼다. 가격은 15만 파운드. 2년 전 지출한 광산 매입가 5만 2,000파운드의 세 곱절을 남겼다. 트랜스발의 루이스 총독은 이를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 진상하려고 마음 먹었다.

영국은 논란에 휩싸였다. ‘백인(영국인)이 백인(보어인: 네덜란드 정착민 후손)을 상대로 치른 최초의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보어전쟁의 뒤끝이어서 여론이 곱지 않았다. 논쟁을 잠재운 주역은 윈스턴 처칠. ‘보어인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생환한 귀족 출신의 전쟁 영웅’이라는 인기에 힘입어 의회에 진출한 32살의 총각 의원 처칠이 나섰다.

마침 식민성 차관을 겸직하던 그는 어머니 랜돌프 처칠 부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국왕에게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할 기념물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국왕의 결심에도 난제는 남았다. ‘안전 확보’가 문제로 떠오른 것. 아프리카 최남단에서 영국까지의 운송로를 노리고 전세계의 도둑들이 군침을 흘렸다. 안전한 수송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끝에 운송 보험료만 50만 파운드로 치솟았다.

영국은 호송선단에 군함을 붙이고 보안요원까지 딸려 화물을 전달받았다. 하지만 가짜였다. 진짜 보석은 보통 우편 편으로 들어왔다. 양동작전 끝에 런던에 도착한 원석을 두고 왕실은 가공 작업에 들어갔다. 세계 최고 장인들에 의해 원석은 9개 대석과 96개 소석으로 갈라졌다. 최상품인 컬리넌Ⅰ은 1907년 에드워드 7세의 66회 생일에 선보였다.


컬리넌Ⅰ은 태국 왕실이 자국 기업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골든 주빌리’(1985년 발견·545.67캐럿)에게 ‘최대 가공석’ 자리를 내줬지만 가치로는 여전히 세계 최고품으로 꼽힌다. 가격은 추정하기도 어려워도 확실한 게 하나 있다. 매년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사실. 컬리넌 다이아몬드 시리즈를 소장한 영국 왕실박물관이 연간 800억원 가량의 관람료 수익을 거두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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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투영하는 다이아몬드가 발산하는 광채는 천상의 색깔이라고 원석 자체가 신의 눈물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갈망과 신화는 대부분 발명품이다. 세계 보석시장을 백 수십년 넘도록 주름잡는 드비어스는 대공황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격이 내려가면 사들이고 오를 때는 소량씩 풀고 있다. 보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허영과 정교한 수급 관리가 고가격의 비결인 셈이다.

다이아몬드의 광채에는 피어린 잔혹사도 배어 있다.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 광맥으로 유명한 시에라리온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또 다른 반군이 뒤섞인 채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려 싸워 11년간 9만 2,000명이 죽어나 양손이 잘려나갔다.

보석을 둘러싼 인간 이하의 잔혹 행위는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 간의 단순한 상쟁이 아니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백인에 의한 잔혹사가 나온다. 시에라리온이 어디인가. 일찍이 바닷길 탐험에 나섰던 유럽인들과 최초로 만났던 아프리카 서부 해안가. 원주민들은 잔혹한 수법을 서구로부터 배웠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리빙스턴 박사와 스탠리 기자를 내세워 ‘국제 아프리카 문명 탐험대’라는 이름으로 탐사한 아프리카 중부에서도 1,000만명이 죽거나 손이 잘렸다. 반항하는 부족에는 다른 부족을 동원해 내부 갈등을 조장했고, 그 끝은 오늘날 ‘다이아몬드 분쟁 지역’인 콩고와 르완다의 인종 청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신의 눈물이라면 신의 잔혹한 눈물인지도 모른다.

국제 보석상 드비어스사가 지어낸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구절처럼 인간의 탐욕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발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검색대를 통과하고 정권 실세와 외교관이 동원돼 다이아몬드 광산의 가치를 부풀려 수많은 개미들을 울린 자원개발의 거품이 불과 몇 년 전이니.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사족 1.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웰스는 행복했을까. 괴롭게 살았다. 연봉의 40배가 넘는 상금 3,500파운드를 노린 친척과 친구들에 로또 당첨자처럼 시달렸다. 실제로는 5,000캐럿짜리 원석에서 5분의 2를 잘라 내 챙겼다는 소문도 그를 평생 괴롭혔다.

사족 2. 윈스턴 처칠 가문은 다이아몬드와 인연이 꽤 깊다. 처칠의 미국인 외할아버지 레오나드 제롬은 철도 투기로 번 돈을 마음껏 쓰며 전용 경마장에서 파티를 열어 여자들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선사하는 졸부로 유명했다. 돈을 써도 써도 뭐가 허전했는지 제롬은 외동 딸 제니를 거액의 지참금을 딸려 영국의 귀족 청년 랜돌프와 맺어줬다. 둘 사이의 칠삭둥이가 윈스턴 처칠이다. 제니는 랜돌프가 결혼 21년 만에 병사하자 5년 뒤 근위대 대위와 결혼했는데 아들인 처칠과 동갑이었다. 두 번째 결혼을 14년 만에 이혼으로 끝낸 제니는 4년 뒤 63세 나이에 23세 연하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제니가 잇따른 재혼에서도 죽을 때까지 간직한 것이 있었다.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라는 이름은 끝내 고집한 제니가 사랑했던 것은 다이아몬드의 힘으로 맺어진 첫 남편이었을까, ‘혈통과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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