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카놋사의 굴욕’ 이면의 경제사



‘잘못했어요, 거룩한 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 살을 에는 한파에도 맨발에 얇은 옷만 입은 젊은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유럽의 강마다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유난히 추웠던 겨울, 빌고 빌어도 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문은 사흘 뒤에야 열렸다. 젊은이는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내내 자기 몸을 때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자비를 빌었다.

용서를 내린 ‘아버지’의 나이가 62세, 처절하게 빌었던 젊은이는 27세였으나 둘은 부자 관계가 아니었다.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교과서에서 익히 봤던 ‘카놋사의 굴욕’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왜 갈등을 빚었을까.


표면적 이유는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다. 젊은 황제는 제국 내의 사제 서품권, 즉 대주교와 주교, 주임신부를 임명하는 권한을 직접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평민 계급 출신으로 누구에게 신세 지거나 세속적 이해관계에 관심이 없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틈을 안주자 젊은 황제는 무리수를 뒀다. 일방적으로 교황을 폐위하겠다고 선언한 것.

그레고리우스 7세는 파문((破門·excommunication)령으로 맞받아쳤다. 종교적인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요, 자신에 대한 반역까지 ‘신의 대리인으로서 정당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는 파문 명령 아래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기도하자 황제는 부랴부랴 교황을 찾았다.

아내와 세 살 짜리 아들, 일부 시종만 거느린 하인리히 4세는 강 넘고 산 넘어 교황이 머물던 이탈리아 중부의 카놋사성에 도달했으나 성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른 지역으로 향하다 하인리히 4세가 남하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병력을 이끌고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해 카놋사성에 피신한 상태였지만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해진 마당. 알현이 막힌 채 굳게 닫혔던 성문은 1077년 1월 28일에서야 열렸다. 황제는 간신히 죄를 사면받았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알려진 사건의 배경과 경과.

경과는 실제와 비슷하지만 갈등의 바닥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었다. 962년 오토 대제 치하에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창한 국호를 받은 이래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부 유럽, 프랑스 서부, 이탈리아 중북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돈, 즉 영토가 필요했다.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대편에 섰던 권신과 귀족에게 빼앗은 영토를 보존하는 방법은 성직자들에 대한 봉토 부여. 교황의 종복이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성직자들을 봉토를 통해 황제의 봉신으로 삼으려는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갈등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놋사의 굴욕은 교권(종교)이 속권보다 우월해진 결정적인 계기로 각인되어 있지만 여기에도 이론이 없지 않다. ‘교황의 완전한 승리’는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갖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마저 교황에 굴복했다는 상징성이 교회에 의해 증폭된 측면이 강하다. 당장 ‘카놋사의 굴욕’ 사건의 결말이 굴욕으로 끝나지 않았다.

관련기사



처자식 앞에서 치욕을 맛본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6년 동안 세력을 키우고 친교황파 귀족들을 누른 뒤 로마로 진군해 그레고리우스 7세를 끌어내렸다. 자기 입맛에 맞는 새 교황을 앉혔던 하인리히 4세는 복수에 성공했을지언정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아들을 포함한 귀족들의 잇따른 반란으로 여생을 한탄 속에 마쳤다.

긴 호흡으로 보자면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인리히 4세의 둘째 아들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한 1125년부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계승권이 선출제로 바뀌어 유력 영주와 도시들은 황제 선거권을 갖기 위해 세력을 키우는 경쟁에 나섰다. 교황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며 시작(1517)된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중앙집권적 왕권은 약해진 반면 개별 영주의 힘은 강해진 토양 속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카놋사의 굴욕이 과연 세속 군주에 대한 교황 권력의 우위를 확인한 사건인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상대적으로 확실한 점은 하나 있다. 광대한 신성로마제국의 분열과 함께 경제권의 분화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치와 종교로 결속되어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핵심(독일과 이탈리아 중북부)이 떨어져 나가며 유럽의 역사와 상업의 흐름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먼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이 저마다 공화국의 기치를 내걸고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자본을 쌓았다. 십자군 전쟁으로 더욱 큰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이 일어나고 근대의 개막을 촉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에서도 황제의 권한이 약해지며 북부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 형성돼 무역과 청어잡이를 근간으로 경제권을 형성해나갔다. 15세기 후반부터 개막된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유럽을 양분했던 지중해 경제권과 북유럽 경제권이 카놋사의 굴욕을 시발로 갈려 나갔던 셈이다.

권홍우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