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충남 서산 태생으로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해 동료와 함께 이듬해인 1940년 1월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작품을 모은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같은 해 11월 항일학생결사 모임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조직, 1941년 3월까지 약 아홉 차례에 걸쳐 회합하며 항일의식을 함양하는 한편 기관지 ‘학생’을 발간했다.
1941년 2월에는 항일학생결사인 다혁당을 동료와 결성해 문예창작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제의 손에 들어가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며 일제에 체포돼 미결수 상태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현이 씨와 3남 2녀가 있다.
빈소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5호실), 발인 15일 오전9시, 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02)2225-1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