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너무 노(老)한 느낌인데, 자연스럽게 다시 불러봐요.” “턴(돌기) 차례대로 한 번씩 해볼까요?”
이어지는 주문에 자판기처럼 춤과 노래, 연기를 쏟아낸다. 예정에 없던 짓궂은 질문을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는 사람도 있고, 당황한 채 어색한 웃음만 흘리는 이도 있다. 노래·연기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4월 26일 개막하는 뮤지컬 ‘파리넬리’의 배우 오디션 현장이다.
지난 15일 서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연습실.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오디션 응시자들은 총 16개 조로 나뉘어 단체 안무와 개별 연기·노래 등을 평가받았다. 작품 속 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고 오는 응시자가 있는가 하면 당돌하게(?) 심사위원에게 대본 속 질문을 던지며 “아 빨리 답해요, 나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야 한다고”라고 즉흥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도 있다. 파리넬리 제작사인 HJ컬쳐의 한승원 대표는 “오디션에서 실력 좋고 스타성까지 겸비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성 있는 배우를 발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뮤지컬 제작사들이 대형 작품 개막을 앞두고 잇따라 공개 오디션을 개최하며 새 얼굴 찾기에 나섰다. 대부분 티켓 판매를 겨냥해 인지도 높은 배우를 캐스팅하면서도 같은 배역에 여러 배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신인을 발굴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CJ E&M은 오는 12월 국내 초연하는 뮤지컬 ‘보디가드’의 전 배역을 오디션으로 선발한다. 지난해 초연한 뮤지컬 ‘팬텀’도 11월 앙코르 무대에 설 배우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다. 박종환 CJ E&M 공연사업본부 마케팅팀장은 “작품 흥행이나 홍보를 위해 인지도 있는 배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해 ‘킹키부츠’ 오디션을 통해 강홍석(주인공 롤라 역)이라는 보석을 발굴했듯 앞으로도 새로운 얼굴을 찾는 시도는 계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 팀장의 말처럼 오디션의 맛은 누가 뭐래도 신데렐라의 탄생에 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앙리·괴물 역을 맡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최우혁은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배역을 거머쥐었다. 위키드 국내 공연에서 최다 ‘엘파바’를 맡은 박혜나는 2013년 초연 당시 여러 단계의 오디션을 거듭하며 커버(대타) 배우에서 주인공으로 승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엔 경력 많은 배우의 오디션도 빈번해지고 있다. 물론 ‘오디션은 안 본다’는 콧대 높은 배우와 이들을 캐스팅하는 제작사가 여전히 있지만, 해외 연출진이 함께 하는 라이선스 작품이 많아지면서 경력 불문 오디션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는 5월과 7월 각각 대구·서울에서 개막하는 위키드의 경우 박혜나·차지연·정선아·아이비 등 주연배우 전원이 오디션을 봤고, 24일 개막하는 맘마미아도 최정원·전수경·이경미 등 이전 시즌 출연자들도 시험을 봐야 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현역 배우에겐 ‘오디션 봐서 떨어졌다’는 게 자존심에 큰 상처이기 때문에 더 긴장하고 그래서 더 많은 준비를 해오곤 한다”며 “경우 따라 공개 오디션이 아닌 그룹, 개별 오디션을 마련하며 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작년 2월 대학 졸업 후 50여 차례 오디션을 봤어요. 오늘은 호흡이 떨어져서 제 실력의 10%밖에 못 보여준 것 같아 속상해요.” 파리넬리 오디션 현장에서 만난 한 남자 응시자는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내일의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 오늘도 많은 배우(지망생)들이 힘차게 오디션을 보러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