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시각] 불황 돌파할 승부사를 기다리며


연초 로봇 혁명 시리즈 취재를 위해 방문한 일본 도쿄의 소프트뱅크 매장에서 '페퍼'를 만났다. 키 121㎝의 아담한 이 감성 로봇은 머리와 몸에 달린 카메라와 마이크로폰으로 사람의 몸짓과 목소리를 읽어내 감정을 인식하고 대화한다. 페퍼의 대당 판매가격은 19만8,000엔(한화 약 210만원). 제조비용은 이보다 훨씬 비싸지만 소프트뱅크는 판매 수익보다 이용요금과 애플리케이션(앱) 판매로 수익을 올린다는 전략이다. 페퍼가 일종의 플랫폼인 셈이다.

페퍼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국내 기업들에 소프트뱅크의 로봇 비즈니스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소프트뱅크의 로봇 사업에는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 인수합병(M&A), 기업 간 동맹, 플랫폼 비즈니스 등 글로벌 산업 트렌드가 응축돼 있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융합 기술의 집합체인 로봇 비즈니스를 위해 프랑스 업체 알데바란 로보틱스와 페퍼를 공동 개발한 소프트뱅크는 지난 2012년 아예 회사를 인수해버렸다. 제조업 경험이 전무한 탓에 로봇 생산도 아웃소싱했다. 애플의 아이폰 제조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페퍼를 만든다. 또 소프트뱅크는 소프트웨어 유통과 이동통신 사업을 하면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로봇 사업을 단순 디바이스 판매가 아닌 플랫폼 비즈니스로 발전시켰다. 페퍼의 부족한 인지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을 보유한 IBM과도 제휴했다. 올해부터 본격화되는 해외 판매는 중국 알리바바가 맡는다.

소프트뱅크뿐 아니라 구글·페이스북 같은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로봇 비즈니스를 위해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을 쓸어담고 있다. 비단 로봇뿐 아니라 제조업과 ICT의 융합을 바탕으로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같은 전통적 방식 못지않게 과감한 M&A와 개방형 혁신을 통한 신기술 개발, 플랫폼 비즈니스를 통한 새로운 시장 창출 등이 시급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국내 기업들의 움직임은 굼뜨기만 하다. 삼성전자 정도만 사물인터넷(IoT) 등 신산업 분야에서 해외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M&A에 나서고 있을 뿐 대부분은 현금만 움켜쥐고 몸을 사린다.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융합 산업 분야에서 유망 스타트업을 삼키고 서로 합종연횡하는 사이 한국 기업들만 뒷짐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1981년 종잣돈 1억엔으로 회사를 창업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끊임없는 M&A와 과감한 벤처 투자로 회사를 일본 재계 12위 기업으로 키웠다. 소프트뱅크 상장 자금인 2조원을 IT 서비스 기업인 지프데이비스와 컴덱스를 인수하는 데 다 썼고 2006년에는 회사가 가진 돈의 전부나 다름없는 20조원을 쏟아부어 보다폰재팬을 인수해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알리바바를 비롯해 슈퍼셀·쿠팡 등 유망 스타트업은 웃돈을 줘서라도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낸 것은 물론 미래 먹거리로 삼았다. 알데바란 인수와 로봇 비즈니스 진출도 같은 맥락이다. 전 업종에 걸쳐 불황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요즘 손 회장처럼 거대한 꿈을 꾸고 과감한 승부수를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기업인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행경 산업부 차장 saint@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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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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