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만주국, 놈놈놈



1932년 2월 18일 중국 심양 대화여관. 장징휘(張景惠)·시치아(熙洽) 등 동북 3성의 실력자들이 동북행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건국 작업은 숨 가쁘게 이뤄졌다. 3월 1일 만주국 건국. 9일 건국기념식 개최. 국가원수인 집정(執政)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올렸다.

수면 위의 건국 작업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으나 물밑에서는 일본군의 공작과 침탈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시기가 1931년 9월. 만주 봉천 외곽 유조구(柳條溝·류타오거우) 부근의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부터다. 피해는 적었다. 파손된 철로라야 불과 수십㎝. 몇 분 뒤 급행열차가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주철도회사의 재산인 철도를 약간 흠집 낸 일본은 중국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인 뒤 ‘군사적 보복’에 나서 만주 전역이 관동군에 휩쓸렸다. 철로 폭파는 침략의 구실을 찾기 위한 위장된 자해 공갈이었던 셈이다. 만주국 건국은 자해 공갈 사건의 완성이자 새로운 침략과 제국주의 경제체제 실험의 출발이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침탈을 감행한 이유는 두 가지. 특유의 호전성과 경제적 이해타산이 깔렸다.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과 전쟁을 통해 세계적 불황에서 벗어나자는 재계의 계산이 맞물렸다. 무엇보다 일본군 안에서는 몇 번의 전쟁 경험을 통해 ‘전쟁=수지 맞는 장사 또는 활황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럴만 했다.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금본위제도를 확립할 재원을 마련하고 1차대전 승전에 따른 호경기를 만끽했었으니까.

학자들도 ‘만몽(만주·몽골)을 얻으면 실업자 구제와 불황 타개, 식량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며 전쟁을 부추겼다. 만주 정세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일제에 협력했던 아버지 장작림과 달리 장개석의 국민당에 합류하고 민족자본을 동원해 일본이 건설한 만주철도를 포위하는 형태의 철도노선을 추진하자 중국과 만주의 분리 결심을 굳혔다.


일본의 기대대로 만주는 새로운 기회를 안겨줬다. 만주국 건국 직전인 1931년 2억2,400만엔이던 공업생산이 1943년에는 39억3,600만엔으로 뛰었다. 중화학과 군수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5년 단위의 계획경제가 먹혀들어간 덕분이다. 만주국 연구의 권위자인 한석정 동아대 교수에 따르면 ‘만주는 일본의 속성 강습반’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일본도 만주의 경기 활황에 힘입어 1930년대 내내 세계를 괴롭혔던 대공황에서 빨리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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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식민지 조선을 취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드넓은 만주를 차지해 경영에서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해 독립의 꿈을 꺾는 변절자들이 많아졌다. 청년들은 독립의 희망 대신 일확천금이나 출세의 꿈을 안고 만주로 떠났다. 교사 직업을 버리고 ‘긴 칼이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청년 박정희, 만주국의 관료가 되고자 대동학원(대학)에 입학한 최규하가 그랬다.

‘동양의 웨스틴’으로 여겨졌던 만주에는 영화 ‘놈놈놈’처럼 온갖 인간 군상이 모였다. 4,300만 만주국 인구 중 100만명 남짓했던 조선인 중에는 아편장수와 개장수, 독립투사와 일제의 앞잡이가 섞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인 다음의 2등 공민’으로 행세하며 다른 민족을 억눌렀다. 만철이 남긴 조사통계월보를 보면 조선인들은 평균 급여에서도 일본인 다음의 봉급을 받았다. 일본 패망 당시 만주 조선인의 일부는 두려워했다는 기록들도 적지 않다.

만주국은 일제가 패한 태평양전쟁 종전과 함께 끝났지만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 아래 ‘관료가 통제하는 경제’는 일본에 이식돼 관 주도형 경제로 굳어졌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성 장관 등 일본의 성장을 이끈 관료와 정치인이 만주국 관리나 관동군 출신이다. 한국은 더했다. 5ㆍ16 쿠데타 이후 군과 정계의 요직은 만군 출신에게 돌아갔다. 만주 인맥이 한일 양국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항일 빨치산이 체제의 근간으로 여기는 북한엔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가 여전하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북한, 일본의 지도자 모두 뿌리가 만주와 닿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군인으로서 뿌리가 만주국에 있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롤모델이라는 외조부가 바로 만주국의 경제 브레인이며 1급 전범 출신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세계사에 유래 없는 공산 세습 왕조를 이어가는 북한의 김정은 역시 젊은 시절을 만주·소련 국경을 드나들던 김일성의 손자다. 만주국이 남긴 흔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미래의 만주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잃어버린 고토(古土) 회복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한국이 통일된 이후에 동북 3성과 상부상조하면 공동의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건만 최근 한반도 정세를 보면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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