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필을 찾아냈어.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아마 이걸 항상 쓸 것 같아. 이름은 블랙윙이야”
소설 ‘분노의 포도’의 작가 존 스타인벡은 작가 시절 내내 자신에게 맞는 문구를 찾아 헤매다 결국 블랙윙 602를 찾아냈다. 존 스타인벡은 심각한 ‘펜 덕후’였다. 우리나라에도 존 스타인벡 뒤지지 않은 ‘덕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덕력’과 펜에 대한 사랑은 상상 그 이상이다. 4종으로 구성된 시리즈가 5,000만원을 호가하는 한정판 펜을 모으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덕력 : 오타쿠, 오덕후, 덕후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덕후의 공력을 나타내는 신조어
△펜을 대하는 ‘펜 덕후’들의 자세
‘펜 덕후’들에게 펜은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같다. 그래서 ‘펜덕’들이 펜을 대하는 자세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펜덕’의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부류는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펜을 모으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훈육으로 아이를 키우듯 펜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꿔 소장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차이를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각인에 대한 인식 차이다. 한쪽은 어떻게 펜에 흠집을 낼 수 있냐며 ‘펄쩍’ 뛰지만 다른 쪽은 평범한 펜에 영혼을 담는 일이라며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잘 보이지 않지만 ‘펜 덕후’의 세계에는 엄연한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펜을 좋아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필감(글씨를 쓸 때 펜을 통해 느껴지는 촉감)을 낚시의 ‘손맛’에 비유해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위해 좋은 펜을 찾는다는 사람도 있다. 직업상 글을 쓸 일이 많은 김동인(31·기자)씨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펜 덕후’가 된 이유를 찾았다. 그는 “글을 직접 쓰면서 손에 맞는 펜을 찾다가 이렇게 좋아하게 됐다”며 “파이롯트사의 G2 모델이 내 손에 가장 잘 맞아 기회가 있을 때 대량으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펜 사랑
‘펜 덕후’들의 연령대는 다른 ‘덕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많게는 80세 노인, 적게는 10대 소녀에 이르기까지 펜을 사랑하고 소장하고자 하는 이들은 연령대가 다양하다. 이 때문에 가족이 함께 ‘펜 덕후’가 된 경우도 많다. 할아버지의 만년필을 시작으로 ‘펜 덕후’에 입문했다는 김성준(27)씨는 “처음에는 만년필을 주신 할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펜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서 이제는 어른들과 취미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고 말했다. 대를 이어 펜 사랑을 지속하고 있다. 실제로 네이버에서 펜 관련 카페 ‘문방삼우’를 운영하며 100자루 가량의 펜을 소장하고 있는 박영수(44)씨도 처음 시작은 할아버지가 대학 입학 때 준 중국산 만년필이었다.
△도대체 펜이 무슨 매력이 있길래
‘펜 덕후’들은 하나같이 펜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자신의 정체성을 펜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방삼우’ 운영자 박씨는 “처음 구매를 하면 똑같은 몸통, 펜 촉이지만 1~2년 쓰다 보면 어느새 자신에게 맞는 펜이 돼 있다”며 “그럴 때마다 펜의 매력을 새롭게 느낀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물건들에 비해 자신과 공감하는 정도가 펜이 더 크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을지로에서 15년째 필기구 매장 ‘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인생을 건 펜 덕후’ 박근일(43)씨는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통해 처음 접한 펜에 빠져 인생을 ‘올인’한 사람이다. 박씨는 “펜의 종류에 따라 필사할 때 느낌이 다 다르다”며 “디지털 시대에 점점 직접 글씨를 쓸 기회가 사라지고 있지만 나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신중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펜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구 시장도 인정한 펜 덕후들의 ‘덕력’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6’에서 개개인의 취향이 트렌드가 되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취향의 트렌드화’의 중심에는 덕후가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마이너 문화의 상징이었던 덕후가 주류 문화로 등장한다는 그의 말은 펜 덕후의 영향력을 통해 증명된다.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모나미가 ‘모나미 153’ 한정판 판매를 통해 고급화 전략을 성공시켰다. 고급 필기구 시장이 큰 편이 아닌 우리나라에 외국 펜 브랜드 대표들이 직접 방문할 만큼 잠재력 또한 인정받고 있다. ‘펜 카페’ 대표 박씨는 “펜을 찾는 소비층이 점점 젊어지고 있고, 소비되는 펜의 종류나 가격대도 다양한 한국 시장이 그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외국 펜 브랜드 대표들의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펜 덕후들의 ‘덕력’이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펜 100여개를 사느라 2,000만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는 카페 운영자 박씨. 아르바이트생에서 사장까지 펜을 위한 펜에 의한 삶을 살고 있는 ‘펜 카페’ 대표 박씨. 아직도 그들은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아직 인생의 펜, 꿈의 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하고자 하는 펜이 있는 한 제 ‘덕질’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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