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경제민주화의 반성적 고찰

고려대 최영홍 교수

지난 2012년의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만큼 위력을 떨친 슬로건은 없다. 경제민주화는 문자 그대로 경제와 민주화가 결합된 신조어다. 이러한 신조어가 갑작스럽게 정치 슬로건으로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도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동시에, 그리고 단기간에 이뤄냈다는 국민적 자각이 기반이 됐을 것이다.

이 용어에는 세계 최빈국에서 출발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정치민주화를 확립했다는 국민적 자부심이 담겨 있다. 게다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주도한 양대 정치세력의 상징적 이미지까지 조합돼 있다. 그러니 중도적 유권자를 포섭하기에 더 없이 유용한 구호였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경제민주화를 놓고 여야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제민주화의 위력은 대선 후에도 계속됐다.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를 달성한 당시의 인식기반에서 가시적 개혁이 요구됐고 그것이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경제 분야의 적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는 경제와 관련한 법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상태여서 의회차원의 입법 드라이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간이 터지는 대기업의 '갑질 논란'은 이러한 움직임에 기름을 부었다. 법률의 품격인 체계성이나 정합성·보편성을 위한 전문가의 참여는 요식적이었다. 소유구조 개선, 일감 몰아주기, 순환출자·편법상속 등 재벌의 탐욕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조치가 이뤄졌다. 대규모유통업법·상생법·가맹사업법·유통산업발전법 등 불공정거래행위를 방지하고 중·소사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유통 관련 법들도 줄줄이 통과됐다. 경제민주화 입법조치로 대기업의 퇴행적 관행은 실제 크게 개선됐다. 이로써 세상은 한층 정의로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경제민주화가 점차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유통 분야에서부터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왜 그렇게 됐는가. 이 또한 국민들의 자각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과 불이익이 점차 누적됐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법률과 시책의 상당수가 국민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주는 상황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그 국민은 헌법의 막연한 장식개념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적 소비주체다. 그러므로 소비자인 국민의 이익을 무시하는 공직자는 민주국가에서는 존재가치가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골목상권을 선점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상인의 기득권이 보호되기 시작했다. 경제민주화가 골목주민을 골목상인의 인질로 전락시킨 것이다. 동반성장위원회의 제과업종에 대한 위법적 권고가 대표적인 예다. 경쟁력 있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사업자에 대해 소비자 접근을 차단해 해당 지역 주민을 기존 업자의 포로로 만든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적 서비스 영역에서까지 '소비자 시민(citizen-consumer)'을 중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민주화는 사적 영역에서조차 소비자 개념이 결여돼 있다. 경제민주화에 정작 민주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강자의 탐욕은 억제하되 소비자인 국민의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방향성을 재정립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업끼리의 상생' 차원을 벗어나 '국민과의 상생'이 추구돼야 한다. 또한 '기업끼리의 동반성장' 차원을 넘어 '국민과의 동반성장'이 추진돼야 한다.

최영홍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유통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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