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무부가 자국 기업의 ‘세금 바꿔치기(tax inversion)’ 관행을 차단하기 위해 초강력 규제안을 들고 나섰다. 조세회피를 위해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편법적 탈세를 사실상 봉쇄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제약업계의 사상 최대 규모 인수합병(M&A)으로 관심을 모은 화이자의 앨러건 인수가 무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4일(현지시간) 미 재무부는 세금 바꿔치기를 막을 새로운 방안을 지난해 9월과 11월에 이어 세 번째로 공개했다. 이번 신규 규제안의 핵심은 ‘수익축소(earnings stripping)’로 불리는 조세회피 방식을 차단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세금 바꿔치기를 해온 미국 기업들은 다국적 기업인 모회사로부터 영업비용을 대출받는 식으로 비용을 떠안고 법인세율이 낮은 나라에 터를 잡은 모회사는 수익을 가져가는 식으로 세금을 낮춰왔다. 그러나 이번 규제안은 모회사에서 미국 기업이 받은 대출을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고 수익(증권)으로 간주해 세금을 매긴다.
이와 함께 미국 기업이 역인수 방식으로 본사를 제3국으로 옮기더라도 미국 주주의 지분율이 80%에 달하면 미국 기업으로 여기기로 했다. 35%에 달하는 법인세율을 피하려는 꼼수를 막겠다는 것이다. 미 재무부는 최근 3년간 이뤄진 M&A에 새롭게 도입한 규제가 소급 적용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기업이 각종 혜택을 받으면서도 본사 주소를 해외로 옮겨 세 부담을 줄여왔다”며 “새로운 법안만이 세금 바꿔치기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세회피용 M&A에 나섰던 기업들은 이번 조치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미국 대형제약사 화이자는 법인세를 줄이려는 목적 아래 1,600억달러(약 186조원)에 보톡스 제조회사인 앨러건을 인수하고 본사를 아일랜드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미 재무부 발표 후 앨러건 주식은 뉴욕증시 시간외거래에서 21% 폭락한 217.99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일각에서는 이번 계약이 깨질 경우 파기 비용만 최소 4억달러(약 4,64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양사는 이날 공동 성명서를 내고 “우리는 현재 재무부의 발표를 검토 중이며 완료될 때까지 어떠한 잠재적 영향력에 대해서 추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조치에 미 정치권도 들썩였다. 민주당 인사들은 재무부의 결정이 세금 바꿔치기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며 환영한 반면 공화당 측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법인세를 적용하는 미국의 세금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