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생활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 별세] 국산 조미료시대 연 '발효박사'…대상을 글로벌 바이오기업으로

日서 어깨너머로 기술 배워…R&D 중시한 과학자

경영 물러나고도 자체 연구실서 식품연구 매진

스스로에겐 검소했지만 사회공헌엔 적극 출연



첫 국산 발효조미료 ‘미원’을 개발한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 겸 창업회장이 지난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임 회장은 1956년 부산 대신동에 대상그룹의 전신인 동아화성공업을 설립한 뒤 독자 기술로 미원을 출시해 국산 조미료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인물이다. 이후 식품보국에 기반을 둔 경영철학으로 대상을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기업이자 글로벌 바이오기업으로 일궈냈다.

임 회장은 탁월한 경영자이기 전에 연구개발과 기술력을 누구보다 중시한 과학자였다. 고인이 생전에 ‘회장님’이라는 호칭보다 ‘발효 박사’라는 별명을 더 좋아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화다. 한국전쟁 직후 일본과 미국 등 외산 브랜드가 국내 식품 시장을 장악하던 현실을 극복하고자 갖은 시행착오 끝에 독자 기술로 조미료를 개발한 임 회장은 국내 식품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임 회장은 당시 명문이던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학과에 진학했다. 피혁공장에서 모피가공 실습을 하며 흥미를 느낀 임 회장은 졸업 후 고창군청에서 공무원으로 5년 정도 근무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그의 나이 25세였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지난 1956년 부산 대신동 동아화성공업(대상그룹 전신) 공장에서 임대홍(오른쪽) 대상그룹 창업주가 첫 국산 발효조미료 ‘미원’의 생산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대상지난 1956년 부산 대신동 동아화성공업(대상그룹 전신) 공장에서 임대홍(오른쪽) 대상그룹 창업주가 첫 국산 발효조미료 ‘미원’의 생산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대상


고향 정읍에 피혁공장을 세운 임 회장은 특유의 꼼꼼한 성격을 발판으로 승승장구했다. 이후 부산과 제주에도 공장을 설립했고 갑작스레 한국전쟁을 맞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지켰다. 전쟁 이후에는 무역업에도 뛰어들어 사세를 키웠다. 하지만 나일론과 합성피혁 등을 앞세운 일본산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제품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 회장의 눈에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임 회장은 조미료까지 일본산을 써야 한다는 현실에 분개해 1955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조미료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운 임 회장은 이듬해 부산으로 건너와 대상그룹의 모태인 동아화성공업을 설립하고 첫 제품인 미원을 출시했다. 인공조미료이기는 하지만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들었다는 점이 입소문을 타면서 미원은 출시되자마자 전대미문의 히트상품으로 부상했다.

대상그룹 창업 초기 ‘미원’ 신문광고대상그룹 창업 초기 ‘미원’ 신문광고



독보적인 점유율을 이어가던 미원은 식품 업계의 영원한 라이벌인 CJ제일제당이 1963년 ‘미풍’을 출시하면서 한때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 미풍이 스웨터를 경품으로 내걸면 미원은 금반지를 사은품으로 주며 견제하는 등 양사의 경쟁은 숱한 화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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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에는 MSG 유해성 논란이 불거졌다. MSG가 인체에 해롭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미원 매출은 급감했고 당시 각종 연구기관의 조사를 통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는데도 소비자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유해성 논란에 시달렸던 미원은 2010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공식적으로 MSG의 안전성을 발표하면서 누명을 벗었다. 미원의 국내 발효조미료 시장점유율은 95%에 달한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미원이지만 요즘도 꾸준히 매출이 늘고 있다. 출시 초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내보다 해외 매출이 더 많다는 점이다. 2005년 처음 국내와 해외 매출이 역전된 이래 지난해 미원의 해외 매출은 전년보다 6% 늘어난 2,000억여원이고 국내에서는 전년보다 2% 증가한 1,027억원을 기록했다.



‘국민 조미료’에 인생을 걸었던 임 회장은 1987년 장남인 임창욱 현 대상그룹 명예회장에게 자리를 넘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7년에는 사명을 대상으로 바꿨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사옥 인근에 연구실을 두고 고추장과 된장 등 전통 발효식품을 연구했다. 경영에서는 손을 뗐어도 식품연구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했다는 게 재계 안팎의 설명이다. 하지만 2005년 부인 박하경씨가 별세하자 외부활동을 중단한 채 조용히 노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임 회장은 생전에 소탈한 행보로도 주목을 받았다. 미원그룹 회장으로 근무할 때 지방 출장을 가면 숙박비로 5만원 이상을 쓰지 않았고 열차도 무궁화호만 고집했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71년에는 사재를 출연해 장학재단을 세웠다. 대상그룹이 오랫동안 별다른 잡음 없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도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분리해야 한다는 임 회장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대상그룹의 한 관계자는 “평소에도 임 회장은 ‘기업인은 우리 것에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밝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분”이라며 “고인의 뜻을 존중해 일체의 조문과 조화를 받지 않고 장례도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오는 8일 오전7시, 장지는 전북 정읍 선영이다.

이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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