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일본 정신’ 발명의 첫단추, 신불분리령



‘정치와 종교의 분리’.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가장 먼저 ‘국가신도(神道·이하 표기는 신토)’를 손봤다. 패전 일본은 한사코 ‘신사에서의 제사가 종교는 아니다’라고 매달렸지만 GHQ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무원 신분이던 신관은 민간인이 되고 얼마 뒤에는 일본왕(덴노) 스스로 ‘살아 있는 신(神)’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리 저리 말을 꼬아가며 밝혔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반발에도 GHQ는 왜 이를 밀어부쳤을까.

일본을 ‘제정일치의 국가’로 봤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적이고 과격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 유포하고 일반 국민에게 강제한 것이 바로 일본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신토라고 여겼다.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명저 ‘국화와 칼’을 보자. 출간 70년에 이르도록 일본 연구의 입문서 자리를 잃지 않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는 연합국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군 포로 비율이 나온다.


전쟁 초기 북부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의 전사자 대 포로의 비율은 120대 1. 서구에서는 이 비율이 3대 1에서 4대 1 정도였다. 서양의 군대에서는 병력의 30% 가량을 잃으면 항복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게 불명예가 아니었던 반면 일본군은 항복을 불충이라며 끝까지 싸웠다는 얘기다. 미국과 연합국들은 이를 광기(狂氣)라고 봤다. ‘덴노(天皇)’를 받드는 국가신토는 광기의 교육장 격이었으니 연합국으로서는 폐지할 수 밖에.

일본인들은 신토란 오래된 전통이라고 주장했었으나 과연 그럴까. 거짓말이다. 왕을 떠받드는 신토는 150년도 안된 발명품에 불과하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이 ‘살아 있는 인간신’으로 국왕을 내세우려는 첫 단추는 1868년 4월 21일, 메이지 신정부가 포고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 내용은 말 그대로 신토(神道)와 불교의 분리였다. 구체적으로 신사의 불상숭배 금지와 신사에 안치된 불상과 방울·범종·불구(佛具) 등의 철거를 내용으로 담았다.

신불분리령은 일본 불교사상 유래 없는 박해를 가져왔다. 낭인들과 신관 출신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위대(神威隊)가 사찰을 돌아다니며 운영권을 빼앗고 불상과 불구를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승려들에게는 불교를 버리고 신관으로 전직하라고 윽박질렀다. 일본판 분서갱불(焚書坑佛) 분위기 속에 불교는 끌어 내려지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크게 훼손됐다. ‘폐불훼석(廢佛毁釋)’


일본은 왜 교리도 빈약한 신토를 내세워 고등종교인 불교를 깎아 내렸을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실상의 군주인 쇼군(將軍)의 위세에 눌려 때로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국왕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토착 신앙이자 왕족의 종교인 신토를 키우고 싶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 가까웠던 쇼군 가문을 견제할 필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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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인 분리령이 나오기 전의 상황은 신토의 불교에 대한 종속. 부처가 신의 중심이며 신토에서 받드는 다양한 신은 중생을 위해 나타난 보살이라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이 대세였다. 새로운 통치이념을 세우려는 신정부는 불교를 정리하지 않고서 전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국 12만개의 사찰이 호적제도와 비슷한 단가제도(檀家制度) 아래 구축한 막강한 경제력도 신불분리령의 배경이었다.

결국 신정부의 의도대로 신불분리령은 불교의 힘을 꺾어놓았다. 불교가 맡아온 국왕의 장례의식도 신토로 넘어갔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신토의 득세는 제국주의와 맞물리며 광기 어린 침략과 압제, 학살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패전국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장 먼저 시행한 내정이 신토와 정치의 분리라는 사실은 국가 종교로서 신토의 폐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신불분리령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교와 신토가 어울려 지내는 신불습합 안에서 각 지방마다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 한국계 신들이 대거 정리됐다. 고약한 것은 국가신토와 일본왕이 일본인들을 조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정신세계를 파괴했다는 점이다. 일제 패망 직전 조선 팔도에 산재한 각급 신사(神社)는 82개. 규모가 작은 신사(神詞) 1,062곳까지 합치면 1,144개 신토 시설에서 눈물 흘리며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친일파가 갈수록 늘어났다. 조선총독부의 목표대로 신사가 늘어났다면 조선 내 신사 숫자는 2,300개를 넘을 뻔 했다.

문제는 현재가 과거보다 더 고약하다는 점이다.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주변국과 갈등에도 아랑곳없이 참배하려는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바로 군국주의를 위한 일본의 발명 2호격에 해당된다. 군국주의 일본 종교를 위한 발명 1호인 신불분리령이 발동된지 2개월 뒤에 공표된 법령인 ‘신기관(神祈官) 설치령’에 따라 세워진 도교 초혼사의 후신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다.

침략과 역사 날조, 만들어진 근대, 국가 이데올로기 발명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계속하고 영토에 대한 망언을 근절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도 오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다. 일본은 다시금 군국주의를 향해 몸을 추스리고 있건만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항일 의병활동을 토벌했다’고 기술하는 역사 교과서가 그렇고 엉터리 위안부 협상이 그렇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단군상을 훼손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게 또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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