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포커스-'구조조정 집도의' 없는 한국] 최고 민간전문가에 전권...GM 구조조정서 배워라

'무능·방만경영' 채권단으론 한계

정부 "시장 자율"만 외치지 말고

업종전문가 등 찾아 힘 실어줘야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듬해 파산했던 세계 1위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 당시 투입된 공적자금만도 495억달러(약 57조원)나 될 만큼 GM은 만신창이 신세였다. 그런데 응급실로 실려온 이 매머드 기업을 살려낸 것은 채권단이 아니었다. 바로 미국 정부가 발탁해 전권을 맡긴 구조조정 전문가들이었다. ‘구조조정드림팀’이라 할 태스크포스(TF)의 수장에는 투자은행과 사모펀드에서 잔뼈가 굵은 스티븐 래트너가 임명됐다. 래트너는 이후 산업 전문가 등을 보완해 14명으로 팀을 꾸렸다. 릭 왜고너 당시 GM 최고경영자(CEO)를 내보내고 10개 이상 되던 브랜드를 4개까지 줄인 것도 TF의 작품이었다. 그 결과 GM은 2010년 69억달러 흑자기업으로 환골탈태하고 2011년 글로벌 차 판매 1위에 복귀했다.

GM 사례를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조정이 더딘 이유가 잘 드러난다. 환부는 썩어들어가는데 믿을 만한 구조조정 집도의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시장 자율 구조조정’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들었지만 정작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채권단은 무능과 방만경영, 도덕적 해이로 얼룩져 있다. 채권단이 고비의 순간마다 퍼주기식 미봉책에 의존하며 단순 돈줄 역할에 머문 결과가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한 해운사, 18조원의 부채에 짓눌려 사실상 껍데기가 된 대우조선해양 등 고사 직전의 조선업종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 오찬 간담회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GM을 ‘시장주도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거론하면서도 정작 그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는 대목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마치 시장자율 구조조정으로 GM이 살아난 것처럼 (우리 정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며 “GM과 하등의 연관이 없는 최고 민간 전문가를 TF 수장으로 앉힌 게 미국 정부”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해운·조선 등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은 ‘뉴노멀’로 대변되는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 맞물려 치밀한 전략 아래 수행돼야 하지만 우리 채권단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정부가 업종 및 기업 경영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최적의 전문가를 찾아 이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구조조정 시스템은 모양만 보면 그럴듯하다.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인 ‘범부처협의체’가 운영되고 있고 여기에 산은 구조조정 담당 부행장과 수은 임원이 포함돼 채권단과의 연결고리도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문성이 떨어지는 등 내실이 부족하다. 범부처협의체에도 업종별 구조조정 전문가는 빠져 있다. 가장 실무에 밝은 참석자가 개별 부처 국장·과장 수준이다.

협의체에 업종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국책은행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산은만 해도 거시를 살피는 조사부 외에 30여명으로 구성된 산업분석부를 따로 둬 개별 업종을 다루고 있지만 한 업종을 10~20년 파고 연구한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는 드물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책금융기관이 정치권의 입김이 들어가는 금융당국 아래 있어 독립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채권단은 그간 부실기업에 대한 관리감독은커녕 기업 경영진과 결탁해 부실을 눈감아주는 등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에서 채권단과 별개로 구조조정 작업을 집행할 ‘전문가 컨소시엄’을 만들어야 한다는 충고가 계속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국채발행이든 한국은행의 발권력 동원이든 자금 마련에 치중하고 구조조정 실행은 이들 전문가그룹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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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금융기관 실정에 밝은 한 금융계 고위인사는 “산은과 수은에 기업 재무분석가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된 업종분석가는 없다”며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에도 정책금융기관 등과 함께 기업여신 분석 작업을 시도했지만 업종·기업별 사전부실 징후를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해 작업이 흐지부지됐다”고 설명했다. 한 산업계 고위인사는 “채권단이 여태껏 구조조정을 잘해왔다면 굳이 별도의 구조조정팀을 만들 필요가 없지만 우리가 과연 그런가”라며 “단순히 재무구조만 다듬는 식의 업종개편으로는 한계가 분명한 만큼 업종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겸비한 산업 전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도 조선업종 개편 과정에서 민간 전문가를 적극 활용했다. 일본은 1998년 당시 ‘조선산업경쟁력전략회의’를 꾸려 금융뿐 아니라 산업 분야 민관 전문가도 모두 모았다. 당시 이 회의에서는 8개 조선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는데 이 계획을 실행한 것은 민간 전문가였다. ‘정부가 큰 그림, 채권단은 자금줄, 금융 및 산업 전문가그룹은 구조조정 실행’ 형태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는 ‘업계 자율 구조조정’이라는 허울만 그럴듯한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 정부는 7월께 업종별 협회가 글로벌 컨설팅 업체에 의뢰한 ‘업종분석 보고서’가 나오면 이를 참조해 구조조정 방향을 정하겠다는 입장만 되뇌고 있다. 하지만 업종분석 보고서는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 적용 대상인 ‘과잉공급 업종’에 속하는 기업을 사업재편으로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 성격일 뿐 칼자루를 쥐고 외과 수술을 진두지휘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한 금융계 고위인사는 “올 초 대만 폭스콘이 애초 우선협상 대상자가 됐을 때 제시했던 가격의 딱 절반 수준에 일본 샤프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조정 전문가가 샤프의 숨겨진 부실자산을 대거 발견했기 때문”이라며 “인수합병(M&A) 등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문가의 역량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구조라면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압박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해운·조선·철강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점도 산업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로 꼽힌다. 일본만 해도 중형 조선사인 이마바리조선 등이 최근 대형 도크를 만드는 등 불황 너머를 대비하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다른 업종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는 섬세한 구조조정이 되지 못하면 추후 경기회복 국면에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산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책금융기관에 출자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만 무성하고 실제 기업재편을 해야 하는 전문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세종=이상훈·조민규기자 shlee@sedaily.com

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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