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번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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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수 영웅담을 다룬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인들이 만든 세계 최고(最古)의 문학 작품이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께 수메르가 몰락하면서 이 서사시의 흔적도 사라졌다. 이 영웅담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800년이 흐른 기원전 14세기께 카시트 출신의 시인에 의해서였다. 수메르어를 비롯한 4개어 사전을 만들어 번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는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번역이 문명 전파자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명확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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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곧 삶이고 문화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저기~’ 혹은 ‘거시기’의 의미를 외국인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이유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파됐을 때가 그랬다. 당시 경전은 주로 서역의 고승들이 번역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몸에 배지 않은 이들이 제대로 의미전달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중국인들 스스로 불경을 익혀 자신들 말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렇듯 경전 번역을 통해 불교는 비로소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일본이 ‘번역 천국’이 된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서양의 거의 모든 서적을 번역했다. 번역을 통해 변혁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이러한 노력 덕이었다.

한국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류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이다. 20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문맥에 맞는 두 음절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며칠이나 머리를 쥐어짜는 처절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황석영·고은과 같은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 이유 중 하나가 언어 장벽 때문이었음을 알기에 뛰어난 번역가의 탄생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역량 있는 번역가를 발굴해 제2, 제3의 한강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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