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기억의 정치학' 아베는 이미 승리했다

국제부 이수민 기자



1945년 8월6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해군 최고 통수기관인 ‘다이혼에이(大本營)’가 자리했던 히로시마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열폭풍과 섬광이 몰아닥쳤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당일에만도 2만명의 목숨이 사라진 그날의 기억을 전후 70년이 되던 해 발표된 ‘히로시마 평화선언’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고향에는 따뜻한 가족의 삶, 인정이 넘치는 마을, 계절을 물들인 축제, 역사적인 전통문화와 유산, 아이들이 뛰놀던 강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 발의 원자폭탄으로 파괴돼버렸습니다.” 히로시마 시장이 해마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발표하는 이 선언문에는 원폭이 왜 이곳을 향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그해 피폭으로 사망한 14만명 가운데 한반도와 중국·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조한 문장 하나만이 실낱같은 기억을 증언할 뿐이다.


기자가 2007년 히로시마를 다큐멘터리 촬영차 방문했을 때도 이곳은 ‘피해자 일본’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기념관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그곳 출신이든 아니든 입을 모아 “우리는 끔찍한 원자폭탄의 피해자”라며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했지만 ‘이곳에 핵폭탄이 투하된 이유는 무엇이냐’는 내 질문은 애써 외면했다. 전쟁을 겪었다는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만 “우리가 전쟁을 일으켰으니까”라고 답했던 일은 9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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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불편한 기억에 긍정적인 자기인식을 덧칠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과한 고노담화를 부정하거나 재일한국인을 공격하는 재특회의 활발한 활동을 정부가 묵인한 일은 대표적 기억 왜곡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를 촉구한다는 목적으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한 것도 ‘원폭투하 사죄’ 또는 ‘과거사 정리’라는 좋은(?) 기억으로 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정부는 거듭 원폭투하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과 헌화가 일본 대중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쉽게 추정된다.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내린 순간 기억을 새로 짜 맞추려는 아베 신조의 정치적 노력은 이미 성공했다.

이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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