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연평도 波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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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년 11월~2월에는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 떼가 봄철 산란을 위해 우리나라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많게는 수십억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조기 무리의 이동에 따라 2~3월 흑산도, 3~4월 위도, 5~6월에는 연평도 바다 위에 큰 장이 섰다. 우리나라 3대 조기 파시(波市)다. 특히 산란하기 좋은 장소여서 조기 품질이 뛰어났던 연평도에는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뤘을 정도다.


갑판 위까지 조기를 가득 실은 어선들이 들어오면 마포·인천·군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상고선(商賈船) 등이 뒤섞여 즉석에서 거래가 형성됐다. 연평도 파시가 전성기를 누렸던 일제 강점기에는 개성에서까지 상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194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연평도 파시가 얼마나 북적거렸는지 짐작할 만하다. ‘가구 수 500가구, 인구 3,000명에 불과한 섬에 260곳의 요정·술집이 생기고 물새로 불리는 400명의 작부들이 어부들을 호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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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파시의 유래는 300년 전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하러 가다 연평도에 정박한 임경업 장군이 섬 앞바다에서 가시나무를 이용해 조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섬 주민들은 농사만 짓지 않고 바다에서 조기를 잡아 생계에 보탰다고 한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연평도 파시의 전설은 1960년대 후반 막을 내린다. 저인망 어구를 갖춘 동력선들이 마구잡이로 남획하면서 조기의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어족 자원 보호를 소홀히 한 대가다.

인천시가 연평도 파시의 부활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조기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 엊그제 7㎝ 내외의 치어 35만미(치어의 단위는 ‘미’)를 연평도 연안에 방류했다고 한다. 2013년부터 치면 벌써 125만미다. 이런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니 연평도 파시의 장관을 다시 보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임석훈 논설위원

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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