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샹그릴라



‘남녀 차별이 없다. 군대도 경찰도 없다. 온대에서 열대까지 모든 기후를 포함하는 지형에서는 온갖 진기한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상냥하고 호기심 있으면서도 예의 바르고 저마다 일을 부지런히 하지만 악착같이 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봐온 것 가운데 가장 즐거운 공동사회다.’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인에게 무릉도원이 천상의 세계였지만 이 영국인에게는 평화롭게 100살이 돼도 40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샹그릴라’가 천국이었다.


하지만 상상 속 세계라도 베스트셀러의 인기를 속세의 인간들이 가만 놔둘 리 없다. 중국에서는 쓰촨(四川)과 티베트의 조그만 마을부터 윈난(雲南)의 리장(麗江)과 중뎬(中甸) 등에 이르기까지 서로 자신이 소설 속 이상향이라고 주장하며 나섰다. 다툼이 커지자 결국 정부가 나서서 ‘중뎬이 샹그릴라’라고 선언하며 마을 이름을 바꿔버렸다. 힐턴이 살아 돌아왔다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을 촌극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최고 갑부인 로버트 쿽(郭鶴年·궈허녠) 샹그릴라호텔앤드리조트 회장이 지상낙원을 구현하겠다며 1971년 싱가포르에 최고급 호텔 ‘샹그릴라’를 세웠지만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아시아안보회의는 북핵과 남중국해 문제로 꽤 시끄럽기만 하다. 이상향이 땅으로 내려오면 이렇게 변질되는 것인가.

관련기사



아시아안보회의가 사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5일 폐막했다. ‘샹그릴라 대화’라는 별칭과는 상관없이 이번에도 평화와 화해보다는 대립과 갈등이 주를 이뤘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와 남중국해 갈등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전쟁에 가까운 설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동맹국을 일일이 언급하면서도 한국만 쏙 빼놓았다. 우리가 공들였던 북핵 문제도 두 강국의 기세 싸움에 우선순위가 한참 밀린 모양새다. 우리의 이상은 미중 양국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는 것이지만 현실은 자꾸 멀어져만 가니 안타까울 뿐이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