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의 대주주는 분명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전후좌우 사정도 보지 않고 기업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오너 일가의 호주머니를 털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어떤 기업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신성장 사업에 뛰어들겠습니까.”
최근 기자와 사석에서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정부와 산업은행이 ‘국민 정서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산업의 마스터플랜을 다시 짜 솎아 낼 부분은 솎아내고 경쟁력이 있는 부분에는 지원을 하는 것인데 엉뚱한 오너 일가 사재 출연 논란으로 ‘헛심’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상대로 한진해운 정상화 작업에 개인 재산을 보태라며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은 재계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조 회장에 대한 사재 출연 요구와 관련해 재계는 물론 관가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한진해운 부실에 대해서는 조 회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한 명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제수(弟嫂)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지난 2006년부터 맡아 경영하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진해운을 2014년부터 떠맡아 정상화 작업을 펼쳐온 일종의 ‘구원투수’다. 이 과정에서 대한항공을 통한 유상증자(4,448억원), 대여금(2,500억원) 지원, 영구채(2,200억원) 매입 등 1조원에 달하는 지원이 이뤄졌다. 한진해운이 정상화될 때까지 연봉을 받지 않겠다는 ‘백의종군’ 선언도 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글로벌 해운 경기 불황 탓에 힘에 부쳐 포기를 선언한 기업인에게 사재까지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분풀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국내 대기업 구조조정 때마다 사재 출연론이 불거진 배경에는 분명한 한국적 특수성이 있다. 보유 지분보다 훨씬 큰 제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업을 부실로 밀어 넣은 총수가 많았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 누린 권리만큼 더 큰 책임을 지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역대 총수들의 사재 출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해당 기업의 직원들조차 오너에게 엄중한 책임을 요구했다. 이를 향해 포퓰리즘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오너라고 해서 구조조정 이슈가 나올 때마다 덮어놓고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오너들에게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요구하면서 법에 근거도 없는 사재 출연 요구를 반복하는 것은 결국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는 독약이 될 수밖에 없다.
총수가 배임·횡령과 같은 회사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행위를 저질렀다면 이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물면 될 일이다.
만약 사재 출연이 ‘한국형 구조조정’의 마무리 단계로 필수불가결하다면 이번 기회에 오너 사재 출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주먹구구식 사재 출연 요구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방해하는 것보다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제시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