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일단 한 우물만 파라' - 매코믹의 수확기



예전만 못하다지만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Super Power). 경쟁력을 유지하는 분야도 많다. 군사력과 항공우주산업·금융·첨단과학 등에서 가장 강한 분야는 어디일까. 답은 농업. 농업인구는 3%에 불과하지만 비옥하고 광활한 토지와 기계화에서 나오는 생산성은 비교할만한 국가가 없다.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에 걸친 미국 제조업의 도약도 농업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던 윌리엄 허친슨에 따르면 1809년 2월생으로 미국인들을 해방한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흑인 노예 해방의 주역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자동수확기를 대중화한 사이러스 매코믹(Cyrus Hall McCormick)이다. 세계최대의 농기구회사인 인터내셔널 하비스터사(International Harvester Co.)의 전신인 매코믹농기구회사의 설립자이며 외상 판매 및 할부 기법의 개척자다.


사이러스 매코믹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부친인 로버트 매코믹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신교도의 후손으로 버지니아주에서 제분소와 제재소까지 운영하는 부유한 농장주 겸 발명가였다. 8남매 중 장남인 사이러스는 농기구에서 ‘바이올린 독학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발명을 선보였던 아버지의 손재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한 우물만 팠다. ‘수확기에 영혼을 사로 잡혔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사이러스가 아버지의 발명품을 토대로 1831년(당시 22세) 제작한 자동수확기는 획기적 성능을 뽐냈다. 당시 8,904㎡(2에이커=2,448평)의 밀을 수확하는데 필요한 인력은 하루 6명. 자동수확기를 이용하면 단 두 명이 그보다 다섯 배 넓은 10에이커의 밀을 거뜬히 거뒀다. 문제는 팔리지 않았다는 점. 1834년6월21일 미국 특허(특허번호 X8277) 취득 후 9년간 판매 실적이 100대를 밑돌았다.

판매 부진의 이유는 두 가지. 유사품의 범람과 인지도 부족이라는 난제가 사이러스를 괴롭혔다. 사이러스는 대응책으로 공개 성능 대결을 벌이는 한편 소송전을 치렀다. 유사품이 나올 때마 그는 송사를 일으켜 경쟁자들을 주저 앉혔다. 특허 분쟁 소송의 상대편에 섰던 변호인 중에는 오하이오주의 이름 없는 변호사였던 에이브러햄 링컨 변호사도 있었다. 링컨 전기에도 이 소송은 자세하게 나온다. *

인지도 부족 문제는 현장 시범으로 뚫었다. 관심을 보이는 농민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 사람들을 모아 공개 시범을 보였다. 운송시설이 마땅하지 않던 시절, 먼 곳에서 문의가 들어오면 아예 특허를 빌려주는 기법도 선보였다. 사이러스는 소송전과 함께 부친의 신규사업 실패로 인한 위기도 넘었다. 철재 용해 사업에 실패해 집안의 돈이 떨어졌을 때도 제품의 질에 승부를 걸었다.

특허 분쟁이 마무리될 즈음, 사이러스는 단안을 내렸다. 고향인 버지니아에서는 상품 운송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1847년 수상운송에 유리한 시카고로 생산 본거지를 옮겼다. 1851년에는 영국 런던 수정궁에서 열린 세계최초의 박람회에 자동수확기를 출품해 금상도 따냈다. 공장도 팽팽 돌아가 1865년까지 2만3,000여대가 팔렸다. 자동수확기는 북군의 남북전쟁 승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


사이러스 매코믹이 사망한 1884년 자동수확기의 연간 판매량은 5만5,000대까지 늘어났다. 비결은 판매혁신. 당시로서는 고가인 120달러(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요즘 가치 3,560달러, 비숙련공 임금 상승률을 기준으로 삼으면 6만100달러)짜리 제품을 팔기 위해 외상 및 할부제도와 본사 직영 세일즈맨 제도를 채택했다. ‘하루에 15에이커를 수확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준다’는 약속도 농심을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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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매코믹은 지극히 미국적으로 기업으로 이끌었다. 독점적인 보급망을 갖춘 매코믹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보다 브랜드 파워를 이용했다. 중소기업이 신기술을 개발하면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는지 살펴보고 특허권을 사들였다. 발명이 도구가 되고 발명가는 거대 생산업체의 종업원이 되는 시대가 매코믹에 의해 열린 셈이다. ***

발명과 생산의 수직 계열화를 이룬 매코믹 농기구 회사는 자동수확기 뿐 아니라 모든 농기구로 눈을 돌렸다. 탈곡기에서 파종기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농기계가 탄생하고 내연기관과 결합한 콤바인까지 나왔다. ‘바퀴 달린 공장’이 수확을 도맡게 되면서 미국 농업의 면모도 급격하게 바뀌어갔다. 사이러스가 수확기 특허를 따냈을 때 미국 인구의 70%를 차지하던 농업종사자는 1900년 10%대로 떨어졌다.

반면 생산은 급증했다. 자동수확기 본격 발매 10년간 밀 생산량이 2배 늘어난 것을 비롯, 농업 전분야의 생산성이 향상됐다. 축적되는 잉여는 기업농을 탄생시켰다. 매코믹의 자동수확기는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농업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미국산 농기구는 신세계(New World)도 휩쓸었다. 사이러스의 생전에 자동수확기는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의 대농장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 매코믹의 자동수확기는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농업의 지도를 그린 기본 요소였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매코믹과 반대편이었던 링컨 변호사에게 자동수확기 특허분쟁은 처음 대하는 대형 소송이었다. 거액의 착수금(500달러)을 받았다고 여긴 링컨 변호사는 밤을 새워가며 자료를 준비했음에도 변호인석에서 변론을 펼치지 못했다. 동부에서 초빙된 유명변호사 에드윈 스탠턴에게 왕따 당한 탓이다. 초라한 행색의 링컨을 본 스탠턴 변호사가 ‘빌어먹을 긴 팔 원숭이(damned long armed ape)가 왜 우리 변호인 진영에 포함됐느냐’고 따진 뒤에 링컨은 소외 당했다. 6년의 세월이 흘러 휘그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스탠턴을 전쟁장관에 임명했다.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민주당 소속이었던 스탠턴을 중용한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스탠턴은 링컨이 암살 당했을 때 가장 슬피 울었다고 한다.

**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을 만든 비지니스 영웅 20’(다니엘 그로스 등 공저)에 따르면 남북 전쟁 중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은 매코믹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북부에서 수확기는 남쪽의 노예들이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젊은 군인들의 농사일을 덜어줌으로써,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동수확기는 국가와 군대에 양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정작 남부(버지니아) 출신인 사이러스 매코믹은 북부를 돕는 게 불편했던지 전쟁 기간 중 해외 판매를 이유로 프랑스에 주로 머물렀다.

*** 기업인으로는 냉혹한 정글을 헤쳐나가고 중소기업을 집어삼켰던 사이러스 매코믹은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시카고 대화재(1871년) 직후 공장을 대폭 증설해 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기업인이라는 갈채를 받았다. YMCA 창립에 돈을 대고 버지니아 대학교를 비롯한 남부의 대학들에 자선기금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 매코믹은 구대륙에서도 활발한 마케팅을 펼쳤으나 먹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럽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노동을 덜어주기 위해 기계에 투자하기를 꺼렸던 탓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유럽의 근시안을 비웃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기업농과 유럽의 소규모 농업 간 비교 우위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환경 보전과 생태계의 중심으로서 농업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으니까.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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