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구로을 투표함





지금은 환경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앨 고어는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맞붙었다. 마지막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의 선거인단을 가져가는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부시가 이겼지만 두 후보 간 표차는 1,784표(0.03%)에 불과했다. 플로리다주는 즉각 기계 재개표를 했고 표차는 327표까지 줄어들었다. 이어 수작업 재개표가 진행되던 중 미 연방대법원의 명령으로 재개표는 중단됐다. 개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평등선거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재개표는 시한을 넘겼고 결국 플로리다주 선거인단을 차지한 부시가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선거 투표함을 개표하지 못한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미국에서는 재개표를 못했지만 우리는 개표 자체를 못했다. 13대 대통령선거일인 1987년 12월16일 오전11시20분 서울 구로을 선거관리위원들이 부재자 투표함을 들고 투표장인 구로구청을 나서려 했다. 투표를 감시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이 부정 투표함이라며 가로막았다. 투표가 진행 중인 시간에 투표함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날 구로구청에서는 1,000여명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투표함을 지켰다. 이들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고 이틀 만인 18일 경찰이 진입해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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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수장고에 보관돼온 그 투표함이 29년 만에 개봉된다. “내년 민주화운동 30주년과 제19대 대선, 2018년 선거 70주년 등을 앞두고 그간 계속돼온 부정 투표함 논란 등을 해소하고 선진 선거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라는 것이 선관위의 설명이다.

미국은 당시 대통령을 바꿀 수도 있는 투표함 재개표를 하지 않았다. 고어는 “연방대법원 결정에 동의하지 않지만 국민 통합을 위해 승복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때 개봉하더라도 대통령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투표함을 진실 규명을 위해 지금 개봉한다. 양국의 국민성이 다른 것일까. /한기석 논설위원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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